이위재 산업1부 차장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는 새 정부 각오가 다부지다. 약자를 이해하고 보듬겠다는 따뜻한 가슴도 느껴진다. 그런데 차가운 머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시와 산하기관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실험이 한창이다. 올 1월 기준 8300여 명이 '정규직'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들은 '중규직'(비정규직과 정규직 중간)이다. 시와 산하기관의 정직원이 아니라 자회사 직원, 말하자면 하청회사 정규직이 된 것이다. 연봉은 평균 1500만원에서 1860만원으로 올랐고, 복지 포인트 등 다른 혜택도 많이 받지만 기대에 못 미친 걸까. 이렇게 '중규직'이 된 한 산하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달 초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면서 파업을 벌였다.

대통령이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인천국제공항도 상황은 비슷하다. 1만여 명 비정규직 모두를 갑자기 '신의 직장'인 공사 직원으로 특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서울시처럼 '사내 하청'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데 '이게 무슨 정규직 전환이냐'는 항의가 터져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부출연연 비정규직 연구원, 정규직 전환"]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풀어야 할 숙제다. 마음 같아선 모두 정규직으로 끌어안고 싶지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대기업에 고임금을 줘야 하는 정규직 직원을 많이 채용하라고 압박을 넣는다면 이들은 외부 하청업체를 착취해 부담을 덜려 하거나 공장을 해외로 옮기려 들 것이다. 그게 실제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공기업은 인건비 증가로 적자 규모가 커지면 결국 국민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

사실 더 큰 고민은 미래로부터 온다. 세계 곳곳에서 주요 산업들이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언제 어떤 일자리가 없어질지 모르는 시대가 됐다. 공장에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양질의 일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 아마존이 실험하는 무인상점 '아마존 고'에선 계산원이 필요 없고,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은 조만간 전 세계 콜센터 직원들을 거리로 내몰 것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하면서 인화나 필름 관련 직종은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며, 자율주행차는 머지않아 택시기사나 트럭운전사, 자동차 보험회사 직원들에게 전직(轉職)을 강요할 것이다. 청소 로봇 성능이 발전하면 훗날 청소원을 월급 주고 고용하는 일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따지기보다 근로자가 구조조정으로 해고되더라도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생계를 어느 정도 보호해 주면서 재취업이 가능하도록 교육훈련까지 지원하는 사회구조를 구축하는 게 답이다. 이런 '기능적 유연성'을 잘 활용해 사양산업 종사자들을 성장산업으로 전환·배치해야 한다. 일본, 스웨덴, 핀란드 등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긴 호흡으로 차근차근 접근해야 한다. 당장의 달콤한 약속이 종국엔 독이 되는 사례를 베네수엘라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