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1일 첫 전화 통화부터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이견(異見)을 분명히 하면서 향후 한·일 관계의 험로를 예고했다. 문 대통령이 대선 기간 공약했던 '12·28 위안부 합의 재협상' 문제에 대해 일본 쪽이 먼저 불가(不可) 입장으로 쐐기를 박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날 "두 정상이 한반도 정세, 과거사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솔직한 입장'을 밝히고 의견을 교환했다"고 했다. 외교 수사(修辭)에서 '솔직한 입장'이란 표현은 상당한 대립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일 관계의 기반' 놓고 충돌

윤 수석은 이날 통화에 대해 "취임을 축하하는 의미로 아베 총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라며 "(한·일) 양국 관계의 발전, 한·미·일 관계의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데 대해서 두 분 정상께서 확인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 극복 노력과 ▲북핵·미사일 대응 및 양국의 미래 지향적 발전을 위한 노력의 병행을 언급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바로 '미래 한·일 관계의 기반'에 대해 분명한 견해차를 노출했다. 문 대통령은 "양국이 성숙한 협력 관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과거사 문제 등 여러 현안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역사를 직시하며 이러한 과제를 진지하게 다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사 현안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또 문 대통령은 "일본 지도자들께서 과거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구치 공동선언의 내용과 정신을 계승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 아베에 돌직구 던진 文대통령]

["위안부 합의, 한국민 수용 못하는 것이 현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곧바로 12·28 위안부 합의를 거론하며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한 기반으로 착실히 이행해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공약한 '재협상'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합의 이행'을 '한·일 관계의 기반'으로 제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에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답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민간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그런 국민 정서와 현실을 인정하면서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말했다. '위안부 합의 재협상'이란 표현이나 '소녀상' 문제가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다고 청와대가 전했지만, 두 정상이 한·일 관계의 시작점을 놓고 정면충돌한 셈이다.

日 여당 "200년 지나도 이행하라"

박근혜 정부에서도 출범 초기 과거사 문제로 정상의 감정이 틀어진 것이 내내 한·일 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2013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취임 축사 사절로 방한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당시 일본 부총리는 박 대통령 면전에서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대해 "미국 알링턴묘지와 다를 바 없다"는 식의 일방적인 주장을 폈다. 이에 격분한 박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 진전 없이는 한·일 정상회담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양국 관계는 냉랭한 상태가 장기간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베 총리가 첫 통화부터 위안부 합의 이행을 요구한 것은 한국에서 재협상론이 본격화하기 전에 미리 선공(先攻)을 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이날 열린 집권 여당 자민당의 외교부회에서는 위안부 합의 재협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강경 발언이 이어졌다. 야마다 히로시(山田宏) 참의원 의원은 "(한국 측은) 재교섭이라던가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100년이 지나도 200년이 지나도 '이행하라'는 일념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가나스기 겐지(金杉憲治)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도 출석해 "재교섭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일본 측이 재협상에 임하지 않을 경우 우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합의 파기'를 선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한·일 관계 파탄이라는 후폭풍은 물론 '국가 간 약속 파기에 따른 신뢰도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문 대통령이 유세 과정에서 쭉 얘기해 온 재협상 문제에 대해 일본이 먼저 쐐기를 박았고 우리도 대응을 안 할 수가 없게 됐다"면서도 "생각보다 문제가 빨리 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