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논설고문

문재인 대통령은 냉철해야 한다.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와 대통령 후보 시절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집권 기간 9년을 총체적 실패의 시대로 규정했다. 본인 말대로라면 실패한 나라를 물려받은 셈이다. ‘적폐(積弊) 청산위원회 설치’를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이런 인식의 반영이다.

대통령은 전체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지는 자리다. 자신에게 표(票)를 주지 않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문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 않은 50% 안팎 보수 성향 국민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집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러왔다. 적폐에 대한 생각도 대통령 지지자들과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정반대에 가깝다.

적폐 청산은 선거용 무기다. 국정을 이끄는 도구가 못 된다. '부역자(附逆者) 처벌'이란 말과 결합하면 언제 흉기(凶器)로 변할지 모른다. 이 단어들이 정치 무대에 다시 오르는 순간 대통합 정치와 협치(協治)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청산의 정치는 되돌아 나올 길이 없는 일방통행로(一方通行路)다. 그 길을 밟지 않으려면 지금 결단해야 한다.

새 대통령의 직무 시작을 지켜보는 마음은 낭떠러지 길을 걷는 사람을 바라보듯 아슬아슬하다. 헌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 직업을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보다 위험한 직업으로 만들었던 그 헌법 그대로다. 전임 대통령들은 이 헌법 아래서 인사(人事)에 전능(全能) 하고 국사(國事)에 무능(無能)한 존재로 변해 갔다. 대통령에게 견제되지 않은 권한을 부여한 것은 뒤집어 말하면 대통령을 지켜주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권력 남용의 유혹으로부터 대통령을 보호해 줄 갑옷은 오로지 본인의 마음 수양(修養)밖에 없다. 참으로 전(前)근대적 발상(發想)이다.

대통령 집무실은 여전히 유배지(流配地)처럼 한갓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 보좌하는 비서진이 대통령을 만나려면 자동차를 타거나 자전거 페달을 한참 밟아야 한다. 안보 위협 규모가 분(分) 단위로 확대되는 휴전선 위치를 감안하면 무모(無謀)하달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고립된 상황에서 전임자는 문고리 권력에 둘러싸여 그들 수중(手中)에 떨어졌다. 과거로부터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고 실패를 낭비한 셈이다.

헌법은 인사에선 대통령에게 황제(皇帝) 대우를 했지만 국회와의 관계에서 대통령은 무력하기 그지없다. 선진화법이 버티고 있는 국회를 움직이려면 전체 의석의 5분의 3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최소 180석이 필요하다. 민주당 의석은 120석 안팎이다. 문재인 정부에 협치는 국정 운영의 필수 요건이다. 대통령이 야당 당사를 방문하는 그럴듯한 이벤트로는 협치의 토대를 다질 수 없다. 책임을 나눠 지려면 권력을 나눠야 한다. 정치에서 분권(分權)은 자리 분점(分占)과 같은 말이다. 협치 대상에게 실제 자리를 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고개를 끄덕일 인물로 판을 짜야 한다. 탕평(蕩平) 인사밖에 달리 길이 없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야당에 던지는 메시지는 미묘하다. 홍준표 후보의 은(銀)메달은 100석 가까운 국회 의석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득표(得票) 격차를 덮지 못한다. 보수 재건(再建)과 재통합 논의가 본격화될 때 자유한국당의 입지(立地)를 그만큼 좁힐 것이다. 당의 근거지인 호남에서도 문재인 후보에게 밀린 안철수 후보의 성적표는 국민의당 내부 갈등을 불러올 가능성을 키웠다. 민주당의 구애(求愛)와 유인(誘引) 작업이 뒤따를 수 있다.

현재의 안보 환경은 비상(非常) 상황이다. 이 상황이 역설적(逆說的)으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트럼프 시대 동맹은 과거의 그 동맹이 아니다. '가치 동맹'과 '이익 동맹'이란 동맹의 두 얼굴 가운데 이익 측면이 두드러진 모습으로 변형(變形)됐다. 한·미 동맹만이 아니라 미·일 동맹 역시 트럼프 바람을 맞았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시대에 맞춰 미·일 동맹을 서둘러 보수(補修)했고 미국과 패권(覇權)을 다툰다던 중국 역시 궤도를 급속하게 수정(修正)했다.

'최대 압박과 최대 개입'이란 트럼프 시대의 북핵 정책은 위기 이후 동북아 빅 딜(Big Deal) 시대를 예고(豫告)하고 있다. 한국은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대통령이 탄핵된 상태에서 홀로 비바람을 맞았다. 한·미 동맹이란 핵심 축(軸)이 흔들리자 한·중 관계, 한·일 관계의 보조(補助) 축이 함께 요동 쳤다.

문 대통령의 최우선 안보 과제는 한·미 관계를 안정화(安定化)시키는 일이다. 대통령 임무는 활주로가 짧은 비행장에서 안전한 이착륙(離着陸)을 시도해야 하는 조종사의 임무와 여러모로 닮았다. 북핵 정책의 주도권 확보라는 탁상공론식(卓上空論式) 계기판(計器板)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모험(冒險)이 너무 크다.

대통령은 정권의 첫 시험대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대미 관계 수복(修復)에 나서야 한다. 협치를 통한 정권의 안정 기반 확보가 그래서 더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