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가 영국 ‘국민차’인 로버 미니와 협업해 발표한 ‘미니 폴 스미스 리미티드’(1998). 폴 스미스의 상징인 줄무늬가 적용된 디자인으로 예술 협업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달리, 워홀…당대 '천재'가 개척한 협업

패션은 물론이고 음료수, 아파트, 게임에서까지 '콜라보'(컬래버레이션의 줄임말)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협업은 일상화됐다. 근래 들어 잦아졌기에 2000년대 이후 활발한 분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역사를 짚어보려면 시계를 마구 돌려야 한다.

컬래버레이션은 원래 경영학에서 '전략적 제휴'라는 의미에서 이용된 단어였다. 경영학자인 마이클 허거트와 디건 모리스의 '협력적 협약(Collaborative Agreements)의 세계적 트렌드'(1987)를 보면 '기업과 기업 사이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작업'이라 정의하고 있다. 다른 두 주체가 만나 시너지를 얻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디자인 분야에도 폭넓게 응용되고 있는데, 패션사(史)에선 학술 연구보다 훨씬 더 앞서 협업이 이뤄졌다.

대표적인 협업 성공작으로 꼽히는 작품들. 위에서부터 올 초 선보인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협업. 디자이너 이브생로랑이 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을 활용해 만든 드레스. 살바도르 달리의 ‘가재 전화기’(왼쪽)와 그와 협업해 만든 스키아파렐리의 ‘가재 드레스’(1937).

20세기를 여는 협업으로 획을 그었던 건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와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만남. 1930년대 당시 가브리엘 샤넬의 라이벌로 꼽혔던 스키아파렐리는 달리를 비롯해 조각가 겸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사진가 만 레이, 극작가 장 콕토 등 당대 최고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협업을 했다. 달리가 해석한 사물의 형상을 패션에 자주 응용해 '패션계 초현실주의자'라는 애칭도 얻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의 만남으로 가장 획기적인 작품으로 꼽히며 이후 칼 라거펠트 등 여러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줬다. 이 작품들은 오는 10월부터 스페인 피게레스의 달리뮤지엄에서 전시될 계획이다.

1965년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이 선보인 몬드리안 드레스는 대표적인 성공작이다. 패션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되고 재해석된 작품으로 꼽힌다. 럭셔리 컨설턴트인 정호정 브랜드빌더스 대표는 "소비자들이 예술을 소유하는 심리적 우월감을 느낀다는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정의에 완벽하게 다가간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960년대 서구 산업사회의 물질주의 문명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 순수 미술과 대중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천재들이 다시 등장한다.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팝아티스트들이다. 예술의 속성으로 꼽혔던 고상한 우아함보다는 좀 더 저속하고 쉬우면서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낙천적 기질을 강조한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다른 영역과 손잡으면서 예술의 문턱을 한층 낮춘다.

루이비통은 제프 쿤스와의 만남 이전부터 컬래버레이션에선 빠뜨릴 수 없는 브랜드다. 2003년 일본 아티스트인 무라카미 다카시와 손잡고 내놓은 멀티 컬러 가방은 전 세계적으로 3억5000만달러(약 4000억원)를 벌어들이며 루이비통을 대표적인 '아트 컬래버레이션' 브랜드로 각인시켰다. 루이비통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크 제이콥스는 "미술과 상업의 결혼이자 패션과 미술 역사책에 실릴 수 있을 만한 작업"이라 자평했다.

결국은 '컬렉터 회장님'의 취향?

패션 밖에서 이런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흡수한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1975년 시작한 BMW의 '아트카 프로젝트'다. 앤디 워홀, 제프 쿤스, 프랑크 스텔라,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대표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은 "기능과 실용만 강조하던 '운송 수단'이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될 수 있다는 역발상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을 보였다"고 말했다.

‘젠가(블록을 하나씩 빼면서 즐기는 보드게임) 빌딩’이란 애칭이 붙은 뉴욕의 ‘56 레오나드’ 아파트. 스타 건축가 헤어초크 앤 드 뫼롱과 조각가 애니시 카푸어가 협업한 건물이다.

'BMW 아트카'가 1970년대를 선도했다면 1980년대 시계 브랜드 스와치와 백남준·키스 해링의 만남, 1990년대 푸마와 아디다스의 디자이너 컬렉션, 2000년대 루이비통 아티스트 컬렉션, 패스트패션 브랜드 H&M·유니클로와 유명 패션디자이너의 협업이 독특한 '시대정신'을 일궜다.

'자본에 예술이 묻힌다'는 지적도 있지만 작가의 활동 폭을 넓힌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시선이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마크 로스코, 바네트 뉴먼, 김환기, 유영국과 같은 추상작가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지금처럼 기업과 협업하지 않았을 것 같다"며 "팝 아트 계열의 작가나 대중문화, 하위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 대형 설치나 공공 미술 작가들에겐 협업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패션 브랜드들이 예술을 내세우는 데엔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예술 애호가란 사실도 작용한다. '현대 미술 10대 컬렉터'로 소문난 베르나르 아르노 LVMH (루이비통 모기업) 회장, 케어링그룹(구찌 모기업)의 프랑수아 피노 회장을 비롯해 프라다, 에스티 로더, 에르메스 재단 등 예술 협업에 적극적인 럭셔리 기업 회장이 대부분 유명 컬렉터란 점이 이를 방증한다.

제프 쿤스와 루이비통의 만남도 연장선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루이비통 수석 디자이너인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빠지고 LVMH 상속녀 델핀 아르노 부사장이 직접 맡아 제프 쿤스와 소통했다.

지루해진 컬래버레이션, 대안은?

무인양품과 후카사와 나오토가 협업한 토스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결과물이다. 눈에 띄는 것엔 죄다 '콜라보'를 붙이는 통에 협업 안 한 제품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이도 있을 지경이다.

협업 포화 시대, 새로움을 위해선 다시 제작자, 판매자, 소비자 모두 윈윈하게 한다는 협업의 출발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박진우 디자이너(대구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상업성을 우선해 겉포장만 덧씌우는 식이 많았던 게 사실"이라면서 "미국 힙합 그룹 '런 디엠시'와 아디다스의 결합처럼 그 브랜드를 진정 사랑하고 이해하는 아티스트가 자신의 정체성과 브랜드 고유의 특성을 모두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업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덕후'가 만들어내는 추종자 문화로 확산시키는 작업도 필요하다. 홍혜진 디자이너는 "밀레니얼 세대 이후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상품과 상품의 결합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출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며 "라이프스타일뿐만 아니라 한국이 강한 IT 기술과 게임, 각종 앱 등으로 확장할 수 있는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