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벽보가 통째로 없어졌습니다."

지난 25일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전화 신고가 접수됐다. 지하철 2·5호선 영등포구청역에서 300m 떨어진 건물 외벽에 붙여 둔 대선 벽보가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영등포서는 경찰 5명을 급파했다. 이들은 건물 부근에 버려진 선거 벽보를 찾아내 지문을 채취하고, 인근 폐쇄회로(CC)TV와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확인했다. 조사 결과 범인은 이 건물 관리인 양모(60)씨로 밝혀졌다. 양씨는 "남이 관리하는 건물에 허락도 받지 않고 대선 벽보를 붙였기에 떼어낸 것"이라고 했지만, 경찰은 30일 양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30일 강릉시 한 아파트 단지에 걸려 있던 제19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바람에 찢겨 펄럭이고 있다. 이날 강원 동해안 일부 지역엔 강풍주의보가 발효됐다. 8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대선엔 역대 최다인 15명의 후보가 출마해 벽보 길이만 10m가 넘는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여 앞두고 선거 벽보를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과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벽보가 훼손됐다는 신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현수막이나 벽보 등 선거 홍보물을 훼손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4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지난 17일부터 27일까지 2주 동안 선거 벽보, 현수막, 유세 차량 등 선전 시설이 훼손됐다는 신고는 총 236건 접수됐다. 이 중 80%(190건)가 벽보 훼손이었다.

특히 이번 대선에 역대 최다(最多)인 15명의 후보가 등록하면서 벽보 관리가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벽보는 한 장으로 연결돼 있는데, 후보자가 많아 길이가 10.24m로 늘어나고 무게도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이런 벽보가 전국적으로 8만7600여장 부착돼 있다. 이를 모두 이어붙이면 경부고속도로(416㎞)의 2배가 넘는 897㎞에 이른다.

충남 공주시 공무원 이모(27)씨는 "무거운 벽보가 바람만 불어도 쉽게 떨어지는 바람에 신고가 들어온다"며 "테이프를 새로 붙이려고 하루에 몇 번씩 현장에 가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벽보가 찢어지거나 훼손된 경우엔 더 많은 행정력이 투입된다. 경찰청 관계자는 "일단 벽보가 훼손됐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관할서 형사과·정보과·지능팀·감식팀 등에서 경찰관 10명 이상이 동원된다"며 "조그만 훼손 흔적이라도 발견되면 지문 채취까지 하지만 고의성이 없는 자연 훼손일 때가 대부분이라 허탈하다"고 했다.

지난 23일엔 부산 해운대구의 한 초등학교 담벼락에 걸린 벽보의 2·3번 후보 사이가 찢어진 채 발견돼 경찰이 긴급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경찰관 12명이 지문을 채취하고 CCTV 영상을 추적한 결과 범인은 담벼락을 오르던 길고양이 두 마리로 밝혀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선전 시설 관리에 과도한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다"며 "벽보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상훈 영산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벽보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매체 홍수 시대라 벽보 효과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관리하는 데 행정력만 낭비시키는 벽보를 계속 유지할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반면 벽보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벽보는 주요 매체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지지도가 낮은 소수 후보의 존재와 공약을 알리고, 선거 분위기를 조성해 투표율을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