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이 있다. 쿠르드족이다. 인구 3000만이 넘는 단일민족이며 하나의 언어와 역사적 자부심을 갖고 모여 살면서도 아직 나라가 없다. 잠재력과 결속력만 보면 벌써 독립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50여만㎢에 달하는 쿠르드의 넓은 땅은 1차 대전 후 네 개의 나라로 나뉘었다. 자기 나라는커녕, 터키, 이란, 이라크 및 시리아 국민으로 갈라져 살았다. 중동에서 ‘비운의 민족’ 하면 이들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유다. 천성이 유약해서였을까? 아니다. 쿠르드는 아나톨리아 고원 동부와 이란 고원이 메소포타미아와 맞닿는 산악지대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용맹한 민족이다. 12세기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3차 십자군 전쟁에서 영국 왕 리처드 1세의 군대를 격퇴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도 쿠르드 출신이었다. 비록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살아왔지만 쿠르드는 결기 있는 민족이었다. 문화와 학문의 수준 역시 아랍 민족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쿠르드족이 겪어 온 오욕의 역사는 1차 대전 종전과 맞물려 시작된다.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 연합국은 패전국 오스만튀르크와 1920년 세브르조약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 재편했고 쿠르드에 자치권을 약속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쿠르드는 동부 아나톨리아를 거점으로 독립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냉혹한 국제정치는 쿠르드 독립을 뒤틀었다. 굴욕적 패망을 견디지 못했던 터키의 젊은 군인들이 케말 파샤를 중심으로 들고일어서서 패전 조약을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세속주의 공화국으로 거듭난 터키는 연합국과 1923년 로잔조약을 새로 맺으면서 쿠르드의 독립을 무산시켰고 여기엔 영국의 속내도 작용했다. 쿠르드의 땅, 모술과 키르쿠크에서 석유가 나오자 영국은 그 지역을 아예 신생국 이라크로 편입시켜 자국의 영향력하에 두었던 것이다. 당시 석유 자원 확보에 온 힘을 기울였던 식민 장관 처칠에게는 민족자결주의나 독립 약속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쿠르드의 독립은 없던 일로 되었다. 불과 3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원칙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국의 이익을 기꺼이 양보하는 나라가 어디 있던가?

2015년 1월 IS에 맞서 싸운 한 쿠르드족 저격수가 5개월간 계속된 IS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 북부 소도시 코바니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역사 해석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만일 쿠르드가 나라를 세웠더라면, 그리고 전체 쿠르드 땅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더라면 지금은 강국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나톨리아 동부 고원지대의 수자원과 이라크 중북부의 석유 자원을 함께 아우르며 아라비아 반도를 내려다보는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하면 쿠르드로서는 땅을 칠 일이다. 백 년 전 혼돈기에 독립 기회를 놓친 쿠르드는 여전히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터키 민족에게 차별받으며 소수민족의 설움을 곱씹고 있다.

엄중한 격변기의 국제정치는 순식간에 요동친다. 나라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한다. 강대국은 약자의 이익을 우선 배려하지 않는다. 1차 대전 후 많은 나라가 민족자결의 멋진 명분과 함께 세워졌지만, 국제사회 그 누구도 쿠르드 민족의 자결은 챙겨주지 않았다. 이익이 갈렸기 때문이다. 낙관론에 기대어 장밋빛 미래를 그리다가 갑자기 암울한 역사와 조우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해방 이후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 다시 중동은 격변기다. 도처에서 내전 중이다. IS는 국경을 흔들며 잔인한 테러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쿠르드에겐 이 혼돈이 호재다. IS와의 지상전에서 쿠르드 민병대의 활약이 대단하다. 국제사회는 쿠르드의 용맹이 고맙고, 빚을 갚고 싶어 한다. 쿠르드는 물실호기의 기세로 싸우고 있다. 어쩌면 조금씩 다시 옛 희망, 쿠르드의 나라를 꿈꾸는지 모른다. 국제정치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낙관도 비관도 금기다. 혼돈의 중동이나 위기의 한반도나 마찬가지다. 쿠르드, 그 비운의 역사가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