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인양되는 세월호. 소설가와 시인, 사회과학자들이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고 써내린 글을 엮은 이 책에서 작가 김애란은 ‘이해’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겸손과 용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2017년 3월 23일. 새벽 뉴스 특보를 틀어놓고 세월호 인양 장면을 몇 시간이고 바라봤다. 진도의 차고 검은 바다가 집어삼켰던 배의 사체가 부유하고 있었다. 처참한 배의 윤곽들이 드러나자 그해 봄 통증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쓴 문장에서 세월이란 단어만 봐도 문장 전체가 가라앉는 게 보였었다. 몇 년간, 세월이란 단어를 거의 쓰지 못했다. 그 말이 내겐 '익사'와 '침몰'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11일. 물에 잠겼던 세월호가 육지로 자신의 몸 전체를 드러내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5일 후면, 이 배가 침몰된 지 꼭 3년이 되는 시간이었다. 끝내 발견되지 못한 아홉 명의 사람이 저 배 속에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해 봄 광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친 얼굴 속에는 아이를 잃은 사람도, 남편과 아버지, 엄마를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걸 눈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그런 종류의 고통을 담아내는 명징한 육체가 있다는 게 내겐 더 충격적이었다. 그림자조차 말라버린 듯한 지친 몸들을 바라보다가 자주 고개를 숙였다.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눈먼 자들의 국가'는 김애란, 김연수, 박민규 등 12명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서 김애란은 2014년 4월 기우는 봄에,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증언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행위를 넘어서 겸손과 용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때로 독서는 단지 책 속의 문장을 눈으로 읽는 것을 넘어서, 그 문장 속을 직접 걸어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

문장 속에 있는 가시와 덤불을 살갗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고통을 체험하는 일 말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으며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침몰하는 순간 죽어갔을 아이들의 저 생생한 고통 너머, 아이들의 죽음 이후 그들의 가족이 반복적으로 느껴야 했을 길고 긴 고통들이었다.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어. 손이 부서지길 바랐지만, 너무 아파서 멈추었지. 하나뿐인 자식을 위해 손 하나 부러뜨리지 못하다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2007년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읽다가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긋고 오랫동안 울었다. 소설에는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9·11 테러로 아빠를 잃은 아홉 살 소년 오스카가 등장한다. 아이는 아빠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블랙'이란 성을 가진 472명의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모험에 나선다. 사건 이후, 고층건물과 대중교통을 무서워하게 된 아이는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몰아치는 두려움과 맞선다.

죽음의 당사자에게 죽음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죽음의 과정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지만, 죽은 사람은 두 번, 세 번 같은 고통을 반복해 느낄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은 그를 사랑했던 사람의 몫으로 더 길고 잔인하게 되돌아온다. 그들을 일컬어 '피해 생존자'라 부르는 건, 그것이 진심으로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이 고통이 얼마나 처참한지 보여준다.

그해 봄, 광장의 사람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진상 규명' 같은 무거운 말과 '우리가 미안하다' 같은 아픈 말이 함께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 가장 깊이 박힌 말은 노란 팻말 위에 적힌 '잊지 않을게!'란 말이었다. 잊지 않는다는 건 무엇일까.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 끝내 기억해내 그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말한다는 건 현재에, 미래에, 어떤 의미일까.

"미래는 과연 과거보다 진보하는가? 그건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은 뒤,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기도 했다…그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그건 진보에 대해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김연수가 쓴 글을 읽다가 나는 이 문장을 소리내어 읽었다. 미래는 과연 과거보다 진보하는가!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이 벌어졌을 때, 경찰은 선장이 배를 버리고 인근 섬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해 지명수배를 내렸다. 하지만 일주일 후, 선장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적어도 훼리호 선장은 살기 위해 가장 먼저 도망친 세월호 선장보다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질문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후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즉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가 더 낫게 미래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저절로 진보하는 게 역사가 아니기에, 지금쯤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졌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지금 읽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3년 동안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중심에 세월호가 놓여 있다. 이 책에서 박민규는 그것을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으로 규정했다. 역사는 저절로 진보하지 않는다. 그 속에 섞여 사는 우리 역시 그렇다. 잊지 않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끝내 기억한다는 말과 같다. 내 현재가 나의 과거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끝내 내 마음을 무너뜨린 건 이 말이었다. 그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아픈 말이었다. "왜 모든 것을 마지막처럼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까, 가장 한스러운 것은 미래를 너무 많이 믿었다는 거야."

눈먼 자들의 국가―김애란·김행숙·김연수·박민규·진은영·황정은·배명훈·황종연·김홍중·전규찬·김서영·홍철기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