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Books팀장

9일 동안 5000㎞를 달린 적이 있습니다. 소위 첫 미국 대륙 횡단 고속도로라는 '루트 66'을 따라서였죠. 하루 500㎞ 넘는 이 무모한 도전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70) 책임도 있습니다. 목적 없는 자동차 여행의 쾌감을 추(追)체험하게 해준 그의 장편 '우연의 음악'을 잊을 수 없었거든요.

이번 주 신간 중에 시리 허스트베트(62)의 소설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뮤진트리 刊)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폴 오스터의 아내. 남편에게 첫 만남의 연월일까지 잊지 못하게 만드는 아내죠. "정확하게 1981년 2월 23일. 어떻게 그 날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번개에 감전된 것처럼 서로에게 빠졌습니다."('폴 오스터 글쓰기를 말하다'·인간사랑刊)

폴 오스터는 종종 아내를 글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독자' '나의 모든 것' 등등.

하지만 소설가 남편에 대한 증언은 찾기 어렵더군요. '살다, 생각하다, 바라보다' 등 다섯 권의 에세이와 소설이 더 있지만, 없어요. 기자는 이럴 때 까닭 모를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서 이런 대목을 찾았어요. 소설을 현실로 오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입을 닫았다고. 하나 더. 나는 나, 남편은 남편이라고. 허스트베트의 2011년 장편 제목은 '남자 없는 여름'(The Summer without a Man)입니다. 그 책이 나오고, 친구가 전화를 했다죠. 폴과 헤어졌냐고.

이번에는 소설가 아내의 다른 증언 하나.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아내인 안나 스니트키나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죠. 불치에 가깝던 남편의 도박벽(癖)이 자신의 드레스와 목걸이까지 팔아먹었으니까요. 어쩌면 잔혹사로서의 삶이었을 텐데도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도스토옙스키와 살아본 다음에 또 누구와 살 수 있겠어요? 톨스토이라면 또 모를까…."

허스트베트의 이번 소설 원제는 Blindfold입니다. 직역하면 눈가리개. '당신을 믿고 추락하는 밤'이라는 우리말 제목이 꽤 신파로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강력하기도 합니다. 이번 주말은 19세기와 21세기 여성의 자의식 격차를 한번 추체험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