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어퍼이스트 사이드. 미국 상류 0.1%가 모여 산다는 어퍼이스트 사이드로 이사한 저자 웬즈데이 마틴은 에세이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에서 이곳 상류층의 생활이 영장류의 생태계를 닮았다고 말한다. 때론 그들의 일부로, 때론 관찰자로 살아온 저자는 이곳 엄마들의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내면의 불안과 공포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제인 구달을 꿈꾼 소녀가 있다. 꿈꾸던 대로 인류학과 생물학을 공부한 그녀는 사랑에 빠졌고 곧 아이를 임신했다. 아이를 키울 곳이 필요해진 그녀가 선택한 곳은 뉴욕에서 가장 안전하고 부유한 맨해튼의 어퍼이스트 사이드. 그곳에서 집을 구하면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이전까지 지내왔던 다운타운과 이곳의 문화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이곳 어퍼이스트 사이드가 영장류의 세계와 흡사하단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며 본격적으로 이곳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해 고학력 전업주부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못돼 먹은 엄마들' 말이다.

그녀들은 대부분 에머리 로스 같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석회암 건물에 산다. 운동과 자기 관리에 목숨 걸기 때문에 저온 착즙 생식 주스나, 플라이휠처럼 건강 정보에 박식하다. 완벽한 몸매로 동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공식 지정 핸드백은 에르메스의 버킨. 아이들을 많이 낳는 특징이 있다(이곳에서 아이 넷은 다른 동네의 '셋' 정도다. 아이 다섯을 낳는 것은 부모가 미쳤거나 독실한 종교인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자치회 면접이나 자녀의 명문 학교 전학 같은 특유의 잔인한 통과의례를 거치며 형성된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는 논픽션이지만 놀랄 만큼 드라마적이다. "제인 구달이 버킨 백을 들고 파크 애비뉴에 정착했다면, 아마 이 책을 썼을 것이다"는 스티븐 게인스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정확하다.

"어퍼이스트 사이드 아이들의 생활은 누가봐도 평범하지 않다. 운전기사와 보모가 있고, 햄프턴스까지 타고갈 헬리콥터도 있다. 2세 아이는 나이에 알맞은 음악 강습을 받고, 3세 아이에겐 유치원 입학 시험과 면접 준비를 도와줄 개인 교사가 붙는다. 4세 아이는 유치원 방과 후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요리, 골프, 테니스, 성악 등 각종 사교육을 받느라 놀 시간이 없어 노는 방법도 잘 모르기 때문에 놀이 지도사가 따로 또 붙는다. 엄마들이 학교나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려올 때 입을 옷을 구매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의상 상담사도 있다."

내게 이 문장이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건 어쩌면 우리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영어 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아이의 혓바닥과 구강 구조마저 바꿔 버리는 엄마들이 존재하는 게 이 나라 아닌가. 하지만 미국의 학기제 때문에 생기는(미국은 보통 8월 말에서 9월 초에 새 학년으로 올라간다) '나쁜 생일'이 존재한다는 이곳의 시험관아기 시술 병원 마케팅 문구를 보고는 기가 질렸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1월부터 11월. 이번 주기는 건너뛰세요!"라는 권고 게시물을 내걸어야 한다니, 말을 말자.

밤새도록 킬힐을 신을 수 있게 마취해주는 족부 전문의들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가. 돈만 내면 아이를 위한 자선 행사든, 남편을 위한 파티든 주사를 맞고 하이힐 위에서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는 얘기였다.

자신의 아이를 완전무결하게 키우고자 하는 이곳 엄마들의 집념은 무시무시했다. 소위 '매니저 엄마'로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실패의 가능성에 제초제를 뿌리는 식이다. 이곳에서 어린이집은 주객이 전도된 세계로, 주인공은 아이들이 아닌 엄마로, 이 뒤집힌 세계에서 아이들은 탄탄한 엄마 팔에 매달린 고급스러운 장신구처럼 보였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었다. 모성애가 패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말이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의 상당 부분이 막 아이를 낳아 이들 문화에 섞이기 위한 저자의 고군분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어린이집을 개코원숭이의 세계에 비유하며 이 독특한 계급 구조를 설명해 낸다. 신입 암컷은 최하위고, 중상위 암컷과 연합하는 데 실패하면 자신은 물론 새끼의 생존마저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어린이집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우두머리 아빠와 친근히 대화한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다들 내게 상냥하게 굴고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 나에 대한 평가가 완료됐으며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나와 말을 섞는다고 해서 자신의 서열이 낮아지거나 공연한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님이 증명됐으므로, 그녀들도 마침내 경계를 늦추었다."

적대감이 친근감이 되기까지 과정은 지난하다. 하지만 오해가 이해가 되는 순간, 이 희귀 종족에 대한 (학자로서뿐만 아닌) 인간적인 이해도 싹튼다. 지독한 운동과 치장이 근원적으로는 성욕을 대체했으며, 공허감을 달래기 위한 중년 남자들의 스포츠카와 와인 수집이 그녀들에겐 버킨백인 것이다. 남편의 와이프 수당에 의지한 그녀들이 결국 의지하게 되는 게 알코올과 약물이란 진단은 어떤가.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한 여자가 수면제 복용으로 식당에서 접시를 머리에 대고 잠들어버리는 모습을 보다가 저자는 불안의 심리에 흐르는 그들 내면 풍경을 그려낸다.

"아이 이가 꺼멓게 됐어. 너무 흉해. 부딪힐 때 충격으로 신경이 죽었대. '치수 괴사가 웬말이니.'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목소리였다…. 한갓 치아일 뿐이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고, 다른 일들도 잘못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내가 현재 누리는 것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바로 그 순간까지 내 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으로만 보였던, 수많은 맨해튼 엄마들 행동의 중심에 도사린 유령이었다. 완벽해야 하고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

끝없이 경쟁하던 이 '못돼 먹은 엄마들'이 '연민 가득한 공동체'가 되어 저자에게 손을 내미는 계기는 그녀가 배 속에 있던 아이를 유산한 후다. 저자는 생태와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현대에도 협력적 양육과 상호의존, 사심 없는 배려에 관한 한 '프로그램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괴한 집단을 유지하는 가장 인간적인 풍경이라고 말이다. 문득 실패 없이 완벽한 삶을 산 그들의 아이들이 만들 미래를 떠올렸다. 아이에게 실패할 기회와 그것을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빼앗는 것.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아동 학대가 아닐까.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기 위한 인생 트로피로 작용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어째서 우리는 때때로 부모가 아닌 학부모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걸까. 경쟁 사회에서 이식된 내면화된 불안과 공포 때문일까.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에 '버킨의 명예퇴직'이란 문장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한때, 이곳 이스트사이드 엄마들에게 완벽히 동화되었던 저자가 우여곡절 끝에 샀던 버킨백을 떠나보내며 쓴 글이었다. 연인 같은 버킨은 떠났다. 파리 6구의 한 병원에 들러 고질적인 팔 저림 증상 원인이 그 백에 있었다는 진단을 받은 후였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웬즈데이 마틴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