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중순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김진용(가명·34)씨는 며칠 전 여자친구가 "아이에게 내 성씨를 물려주고 싶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연봉은 서로 비슷하지만, 집안 사정은 여자친구가 훨씬 나아서 여자친구가 아파트를 해오고 김씨가 혼수를 마련하기로 했다. 김씨의 여자친구는 "금전적인 부분은 내가 더 해가도 상관없지만, 아이는 내가 낳는 것이니 내 성씨를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자신의 성씨를 물려줄 거라 예상했던 김씨는 "아이가 커서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쩔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30살 동갑내기 부부인 박지민(가명)씨와 신영재(가명)씨는 연애 시절부터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해 데이트 비용을 반반씩 계산했다. 결혼 비용과 신혼여행 비용도 정확히 나눠서 계산하고 혼수 없는 결혼을 했다. 집안일도 공평하게 나눠 하면서 한 번도 싸운 적 없던 이 부부는 얼마 전 아이를 가진 뒤로 다투기 시작했다. 남편 신씨가 작명소에서 아이 이름을 신씨 성(姓)에 맞춰 '신○○'으로 지어왔기 때문이다. 박씨는 "당연히 나와 논의해서 어느 성씨를 따를지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고, 남편 신씨는 "남들처럼 아빠 성을 따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박씨는 "연애 시절부터 '평등평등'하던 남편이었고, 모든 부분을 서로 상의하에 평등하게 했는데 왜 아이 성씨 문제만큼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젊은 부부들 사이에 '아이 성씨' 문제로 다툼을 벌이는 일이 왕왕 벌어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성 평등 의식이 강화되면서 자녀의 성씨 결정 문제에까지 권리 주장을 하는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아버지의 성 뒤에 어머니의 성을 붙여 부모 성을 모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사용하더라도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7년 헌법재판소가 호주제 위헌 결정을 내리고 2008년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가족법)'이 시행되면서 어머니 성씨를 따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자녀의 성(姓)과 본(本)은 원칙적으로 아버지를 따르도록 하되, 부부가 혼인신고를 할 때 태어날 자녀가 어머니 성을 따르기로 협의한 사실을 신고하면 출생신고 시 어머니의 성과 본으로 가족관계등록부에 기록할 수 있다.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자 부모 성씨를 함께 사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아예 남편 대신 자신의 성을 자녀에게 물려주겠다는 여성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본지가 전국 17개 도 190개 지역 자료를 분석해보니, 어머니의 성과 본을 사용하도록 출생 신고를 한 경우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총 1533건에 달했다. 광역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도(461건)였으며, 세종시가 4건으로 가장 적었다. 기초자치단체 중에선 경기도 시흥시가 49건으로 가장 많았다.

또 가족법은 아버지나 어머니 청구로 법원 허가를 받아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할 수 있게 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포털사이트에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는 방법이 궁금하다" "남편 성이 너무 특이해서 내 성으로 바꿔주고 싶다" 등의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법률구조재단 로시컴 송명호 가사법 전문 변호사는 "실제로 성씨 변경에 관한 상담이 5년 전에 비해 약 30% 증가했다"고 전했다.

성씨 변경을 원할 경우 가정법원에 자녀의 성과 본 변경 신청서를 접수하면 되지만, 법원 심사 요건이 까다로워 기각 확률이 높다. 송 변호사는 "단순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했다거나 가정불화로 인한 변경 신청은 10건 중 한 건도 성사되지 않는다"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아, 웬만한 이유로는 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만약 아버지의 동의가 있다면 60~70% 확률로 수용된다"고 했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 자기 자식이 남편 성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혜영 숙명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은 아이를 낳게 되면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등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지만, 남편은 받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 하다"며 "그럼에도 무조건 자녀가 남편 성씨를 따라야 하는 현실을 젊은 여성들이 불합리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녀에게 성씨를 물려주는 것은 남성들이 쟁취해서 얻은 권리가 아닌 물려받은 것"이라면서 "남성들은 아내가 자녀 성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 기존의 명문화된 권리를 잃는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