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합정동 일대 밤 풍경. 김민섭의 책 ‘대리사회’에서 저자는 직접 생업으로 대리운전을 하며 ‘순응’이 어떻게 우리 몸에 새겨지는지를 파헤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사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이다.

잡지 창간호 준비로 인한 스트레스로 나날이 머리숱이 사라지고 있던 선배에게 했던 말이 있다. 외국의 비싼 라이선스가 아니라, 한국에 특화된 아이템이 시장에서 더 승산이 있지 않겠느냐는 농담이었다. 그때 내가 말한 잡지가 '월간 대리'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회사에는 '대리'가 있는데 대리만큼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직책이 없고, 심지어 한국에는 '우버'도 뚫고 들어오기 어려운 '대리'운전 시장까지 있으니 100만 대군은 이미 확보했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대박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허무맹랑한 내 말에 기겁하듯 웃던 선배와 나는 최대리, 백대리 시절을 추억하며 삼겹살집에서 여러 병의 소주를 마신 후,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집으로 갔다.

작년부터 상담 관련 일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게 있다. 라디오든 잡지든 사람들이 보내오는 사연과 고민의 많은 부분이 '나로 사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라는 것이다. 완벽한 스펙을 자랑하는 한 직장인이 인생이 통째로 잘못 쓴 오답지 같다며 유학을 가야 할지 사표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녀에게 물어본 건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 말고, 본인이 진짜 원하는 건 뭐예요?"였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이론 같은 걸 대입하지 않아도, 이런 일은 한국에서 일상다반사다. 입시 지옥에서 자란 우리는 쉽게 부모님의 욕망을 내 욕구라고 착각한다. 누군가의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과장으로 사느라 어느새 '내'가 사라진 사람도 수두룩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한국은 역할 사회이며, 이 땅에서 가장 큰 사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란 것이었다. 그때, 눈에 띄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대리사회!' 순간 머릿속에만 있던 '월간 대리'의 아카데미판이 나타난 것일까란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책을 잡는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펜 끝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 쓴 글에서 느껴지는 단백질 가득한 문장들에선 단단한 눈물 냄새 같은 게 났다.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가 통제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간단한 조작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으면 그대로 두고, 의자의 기울기에도 몸을 적응시켜 나간다. 차의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조절해 놓은 것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다음으로 '말'의 통제다. 손님에게 말을 먼저 건네는 대리 기사는 거의 없다. 차의 주인이 화제를 정하고 말을 건네면 반가이 화답하지만, 그가 침묵하면 나도 묵묵히 운전만 한다. 서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제한적으로 '네 맞습니다'라는 대답만 주로 하게 된다…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를 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아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런대로 편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운전만 하면 되었고, 손님이 뭐라고 하든 '네 맞습니다' 하고 영혼 없이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타인에게 질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책 '대리사회'는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대화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떻게 우리 몸에 새겨지는지를 파헤친다. 저자는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이 어디에도 있다고 말한다. 부하 직원은 상사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고, 학생은 교수의 의도에 벗어난 질문과 답을 찾지 않으며, 아이 역시 부모에게 더 이상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의 방식이며, 이미 우리 사회의 소통이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됐다고 잘라 말한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 된 '대리'라는 명사가 사회 곳곳에 암처럼 퍼지게 된 경위를 돌아보는 저자의 실제 경험은 눈여겨볼 만했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 노동이다…이런 중소도시의 작은 마트에까지 그런 채용 방식을 둔다는 것이 무언가 서글펐다. 취직을 하더라도 아마 나의 소속과 직책은 홈플러스의 계약직 점원이 아닌 (대리인을 낀) 아웃소싱 업체의 파견 직원이 될 것이다."

전작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에서 저자 김민섭은 맥도날드 물류창고에서 일했던 1년 3개월간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햄버거를 만드는 곳에서도 지켜졌던 '노동권'이 정작 지식을 만드는 공간인 대학에선 철저히 배제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생업으로 대리운전을 선택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활자 밖 세상으로 나온 젊은 학자가 자신이 탐구했던 문장들을 격렬히 앓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그가 노동을 통해 깨닫는 건 '모든 거리에는 저마다의 문법'이 있고, 그것을 익히지 않으면 어느 생태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역 단위로 버스 막차가 끊기는 시간을 검색해보고 그에 따른 목록을 만들었다.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나누었다…나는 지명만 보고도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토박이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다고 마음먹으면서 직접 가보기도 했다. 가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가보고 후회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 혹은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머리와 몸이 함께 기억해 나갔다."

대리 기사로서의 기초 문법을 떼는 순간, 저자가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깨닫는 건 단지 버스 막차 시간이나 지명들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 안의 사람들과, 그들이 언제 어떻게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가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저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은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라고 적는다. 이 책이 '갑의 대리인'으로 그들만의 전쟁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을'의 노동 조건을 분석한다는 것 역시 의미가 깊다. 하지만 이 책이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문장의 온도다.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떨어진 대리 기사와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택시 기사 간의 연대, 손님을 태우는 남편과 남편을 태우는 아내의 연대, 기사와 손님의 연대, 책에 실린 모든 에피소드에는 특유의 '온도'가 남아 있어 읽는 내내 손끝이 저릿했다.

특히 타인을 주체로 일으켜 세우며 자신의 공간을 환대의 장소로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선생님의 차라고 생각하고 운전해주십시오' '더우실 텐데 에어컨을 좀 틀어 드릴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기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여러 날 대리 기사들에게 조수석에 앉은 내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침묵과 정적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좋은 책은 자신을 환기시키고 유의미한 질문을 만든다. 이 책이 내게 준 각성이 고마웠다.

●대리사회―김민섭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