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을 앞두고 보수 정치가 그야말로 진공 상태로 들어갔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선 불출마 입장을 밝히기 전인 지난주 한국갤럽 정기조사에서 범(汎)야권 주자 지지율 합계는 67%였고 범여권 주자들 경우 다 합쳐 10%였다. 야권 절대 우세의 구도가 계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번 주 황 총리도 불출마를 선언했다. 국정 위기 속에서 불가피한 결정이었지만 보수 진공 상태는 더 심해졌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또 한 명의 예비 주자가 없어진 것이다. 황 총리에 대한 10% 안팎의 지지율은 진보·보수의 다른 후보들로 흩어졌다.

앞으로 대선까지는 50여 일 남았다. 1990년대 이후 역대 대선의 이 무렵 여론조사에서 다자(多者) 구도라 하더라도 보수 후보들 지지율이 30%를 못 넘긴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이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이 찍을 사람이 없다는 탄식만 하고 있다. 안보를 중시했던 사람들에겐 초유의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보수 빙하기가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화제 자체를 피하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이 전체 유권자의 8~10%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난 대선 기준으로 치면 최대 400만명 정도다. 선거 불참도 정치적 의사표시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안보와 경제 위기를 헤쳐나갈 국론 통합이 절실한 상황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큰 원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크고 깊은 데다 작년 총선과 탄핵 정국을 거치며 보수층이 분열까지 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처를 치유해 보수를 재건할 능력 있는 리더십이다. 자유한국당은 황 총리만 쳐다보고 있다가 낭패에 빠졌다. 황 총리 출마가 결국 쉽지 않을 것이란 상식적 판단을 애써 외면해온 결과다. 그러면서 11명의 대선주자가 난립해 국민을 어이없게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 머릿속엔 다음 총선에서 어느 줄에 서야 하느냐는 계산뿐이라고 한다. 바른정당이 '보수 재결합'과 '제3지대' 사이에서 이리저리 저울질을 하는 것도 정략적으로 비치고 있다.

지금 보수 정치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자기희생이다. 자리를 비켜줘야 할 사람, 나서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모두 버티며 반대로만 하니 국민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분열된 보수 정치, 흩어진 보수 민심을 다시 합치고 모아나가려면 작은 단초라도 만들 희생이 이어져야만 한다. 남은 50여 일 동안 보수 회생(回生)에 일말의 희망조차 보여주지 못한 채 지난 몇 달간의 지리멸렬을 답습한다면 지금의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은 언제 끝날지조차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