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과학기술을 도입해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만든 최형섭의 'KIST 모델'은 1960년대 세계 첨단 개발 이론을 한국에 적용하면서 만들어졌고, 1970~80년대 개발도상국들에 전파돼 큰 영향을 미쳤다."

1972년 1월 14일 최형섭(왼쪽) 과학기술처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연구소가 개발한 전기 제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1966~1971)과 과학기술처 장관(1971~1978)을 지낸 고 최형섭(1920~2004) 박사의 과학기술 정책론의 형성과 전파 과정을 밝힌 논문이 나왔다.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자인 임재윤과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고 최형섭 박사와 동명이인)가 역사 교양지 '역사비평' 봄호에 발표한 '최형섭과 '한국형 발전 모델'의 기원'.

최형섭 박사가 과학기술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원자력연구소장으로 재직하던 1965년 8월 유네스코가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시드니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하면서였다. 그는 3주간 아시아 각국의 과학기술 정책 책임자들과 어울리며 과학기술과 경제 발전에 관한 최신 이론을 흡수했다. 이어 1966년 2월 미국 지원으로 문을 연 KIST를 이끌게 된 뒤에는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정책에 관한 독자 모델을 정립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그가 만든 'KIST 모델'은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해 해외 선진 기술을 도입하고 발전시켜 산업계에 전파하며, 경제가 발전하면 산업별로 전문 연구소를 세워서 지원하는 전략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하던 수출 지향의 불균형 성장 전략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KIST 모델'은 1972년 10월 인도네시아의 기술 개발 전략 마련을 위해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에서 인도의 '나유다마 모델'과 경쟁하게 됐다. 인도 과학기술 정책을 이끈 나유다마(1922~1985) 박사는 나라마다 고유의 천연자원과 원자재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며 전통 피혁산업의 기술 혁신에 힘을 쏟았다. 이는 당시 제3세계의 발전 이론으로 각광받던 내포적 공업화와 맥락을 함께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최 박사의 손을 들어 자문을 요청했다.

최 박사가 'KIST 모델'의 핵심 요소로 꼽은 것은 과학기술에 특별한 관심을 지닌, 계몽된 정치 지도자였다. 이런 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진 한국은 매우 운이 좋았다고 강조했다. 최형섭 박사는 자신의 이론을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개발 전략'(전 3권·국영문)으로 정리했고, 'KIST 모델'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스리랑카,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에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