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전범(戰犯)을 단죄하는 첫 재판이 1945년 11월 20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다. 수석 검사를 맡은 로버트 잭슨 미국 대법원 판사가 법정에 섰다. "우리가 지금 재판하는 하나하나가 나중에 역사가 우리를 평가하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역사적 재판의 무게를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열 달 재판 끝에 1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나치 외교정책을 맡았던 리벤트로프는 교수대에서 "세계 평화를 빈다"고 했다. 이 판결로 역사의 책장이 넘어갔다.

▶하나의 판결이 나라의 운명과 시대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1857년 '흑인 노예는 재산권 대상'이라는 미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은 남북전쟁을 불렀다. 그랬던 미 대법원이 1954년 '흑백의 생활 터전을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60년대 킹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은 이런 변화의 열매였다. 1966년 미 대법원은 연쇄 성폭행범 어니스트 미란다의 청원을 받아들여 "연행 당시 묵비권과 변호인 선임권을 알려주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피의자 권리를 크게 높인 이른바 '미란다 원칙'의 출발이다. 성폭행범이 형사 사법 사상 가장 위대한 판결을 이끌어낸 케이스로 꼽힌다.

▶역사적 판결이 늘 옳았고 정의의 편에 섰던 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시민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제자들의 탈옥 권유에도 "국법을 파괴하는 불의한 짓"이라며 기꺼이 독배를 마셨다. 1959년 간첩죄로 사형된 조봉암도 52년 만인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정의 판결에는 늘 증거로만 판단해야 하는 한계가 따른다. 민감한 사건이나 사형 선고를 앞둔 판사들 고민은 클 수밖에 없다. 일제 치하인 1923년 서른여섯 살 판사 이찬형은 사형 선고를 내렸다. 독립운동 하던 동포였다. 이찬형은 사나흘 밤잠을 설쳤다. '내가 무슨 권리로 사형 판결을 할 수 있는가?' 그는 번민 끝에 출가(出家)해 스님이 됐다.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스승 효봉 선사가 바로 그다.

▶오늘 헌재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선고한다. 기각하면 대통령직을 유지하지만 인용하면 파면된다. 우리 헌정사에서 가장 중요한 재판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광장엔 "기각 땐 폭동" "인용 땐 참극"이란 협박이 들끓는다. 재판관들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들이 훗날 역사에 심판받는다는 각오로 현명한 결정을 내렸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