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논설위원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제) 보복은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 완력으로 다른 나라 정책을 바꾸려는 사실상의 무력행사다. 우리로선 퇴로도 없다. 굴복하는 순간 주권국이 아님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어떻게든 버텨서 국가 의지를 관철하는 길밖에 없다.

싸움이 되겠느냐고들 한다. 국력 차이가 너무나 크고 우리의 중국 의존도는 절대적이다. 관광·유통업계에선 벌써부터 비명이 터져 나온다. 병자호란 때처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할 것이란 공포감이 무성하다. 중국도 우리가 만만하니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힘도 없는 한국이 얼마나 버티겠느냐고 말이다.

정치학자 이반 아레긴-토프트 교수(보스턴대)가 내놓은 흥미진진한 논문이 있다. 그가 1950~1998년 중 강대국과 약소국이 벌인 전쟁을 분석했다. 인구·군사력이 10배 이상 차이 나는 45개 비대칭 전쟁이 대상이었다. 이 정도 국력 차이면 뻔한 싸움 아닐까.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약소국이 이긴 경우가 무려 55%에 달했던 것이다.

그중엔 우리가 잘 아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베트남이 미국을 꺾었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 패퇴했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아랍 강호들과의 세 차례 전쟁을 다 이겼다. 10대1의 국력 차이라면 어른과 어린애의 싸움이다. 그런데 어떻게 약소국이 절반 넘게 이긴 것일까.

아레긴-토프트 교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의지 요소다. 전쟁은 대개 강대국의 침공으로 촉발된다. 강대국으로선 남의 땅에서 싸우니 이기려는 의지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반면 약소국은 지면 나라가 망한다. 생존이 걸린 약소국이 더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이런 정신적 요소가 전쟁의 흐름을 가른다.

둘째, 여론 요소다. 강대국이라고 전쟁이 공짜는 아니다. 군인들이 죽고 전비(戰費) 부담이 생긴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강대국의 피해도 커진다. 그 결과 반전(反戰) 여론이 형성돼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 베트남전 때 미국이 그랬다.

셋째, 전략 요소다. 약소국이라고 속수무책은 아니다. 정규전은 강대국이 세지만 약소국에 유리한 전략도 있다. 게릴라전이나 기습·야습·유격전 같은 것들이다. 약소국이 정규전을 피하고 비정규전을 구사할 때 이긴 경우가 많았다.

세 가지 비결은 사드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첫째, 져선 안 된다는 의지는 우리가 강할 수밖에 없다. 중국으로선 체면이 깎이는 정도지만 우리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중국의 보복은 온 국민을 분노시켰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중국의 오만함에 격분하고 있다. 적어도 협박 때문에 사드를 철회할 순 없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둘째, 중국이 엄포 놓는 경제 보복 또한 공짜가 아니다. 우리에게 보복하면 중국도 대가를 치른다. 중국의 산업 구조는 한국산 부품·소재에 의존하고 있다. 관광 역시 중국엔 한국 여행객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우리에게도 카드가 있다. 중국이라고 마음 놓고 칼을 휘두를 형편은 못 된다.

셋째, 우리가 우위를 갖는 전략이 존재한다, 국제 여론전이다. 중국의 보복은 명백하게 국제 통상 규범을 어긴 것이다. 정치적 이유로 무역 보복을 금지한 WTO(세계무역기구) 규정 위반이다. 중국이 국제 규범을 무시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힘 대결 대신 프레임으로 맞서는 것이다.

중국은 자유무역의 신봉자인 양 행세해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를 준열히 꾸짖기까지 했다. 그게 얼마나 위선인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게 특효약이다. 힘으로 주변국을 궁핍화시킨다는 프레임은 중국의 아킬레스건(腱)이다. 급소를 찔러 국제 여론이 중국을 압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약자의 전략은 강자와 달라야 한다. 중국은 경제력과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가 똑같이 맞대응하면 중국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이다. 뒤에서 중국 제품 수입을 골탕먹이는 식의 꼼수를 써선 안 된다. 중국 여행 금지령이나 중국산 불매(不買) 운동도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중국처럼 치졸해선 안 된다. 우리가 도덕적 우위에 서야 한다. 국제 규범을 준수하면서 중국의 횡포를 알리는 것이 상책이다. 정부는 물론 학자와 민간단체들이 나서야 한다. 중국이 얼마나 남을 못살게 구는지 국제기구와 해외 언론 등에 알려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결코 지지 않을 게임이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정치가 망치고 있다. 적은 문밖에 와 있는데 대통령은 유고(有故)이고 정치권은 분열돼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유력 후보들은 이상하게도 중국엔 관대하기만 하다. 중국에 맞설 전략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상 전쟁을 이긴 약소국은 예외 없이 좋은 리더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지도자 복이 지지리도 없다. 유리한 카드를 손에 쥐고도 이것을 구사할 전략적 리더가 없다. 반드시 이겨야 할 게임을 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고장난 정치 리더십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