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일 도시·교통 전문기자

작년 말 경부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했다. 2명이 탄 승합차가 버스전용차로에 불법 진입하다가 5중 추돌을 빚었다. 출동한 경찰은 "크게 다친 분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보험 처리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복잡한 서류 업무 하고 싶지 않으니 마무리는 보험사에 맡기자는 얘기다. 나는 트렁크 속 물건이 깨질 정도로 일그러진 내 차와, 버스 문이 망가져 갇힌 승객들을 가리키며 "큰 사고이니 정식 접수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가해자 측이 내게 되레 "까탈스럽다"고 항의했다. 몇 년 전에는 자유로에서 졸음운전 트럭에 추돌당했다. 운전자가 "경찰에 신고하면 밥줄 끊어진다"며 매달려 보험사에 맡겼다. 6개월간 통원 치료를 받았는데도 사과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빨리 합의하자"는 보험사의 종용만 잇따랐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사고를 겪을 때마다 우리 몸과 마음은 내상(內傷)이 깊어진다. 도로 위 만인이 적(敵)으로 보여 화내고 욕하고 덩달아 난폭 운전까지 한다. 과연 우리의 타고난 '수준' 탓일까.

경찰 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도로 교통사고는 연평균 23만건에 사망자 5000명, 부상자 35만명 선이었다. OECD 34국 평균치의 딱 두 배로, 늘 최하위권이다. 게다가 사고와 부상자 수는 턱없이 적게 잡혀 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보험사에 맡긴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손해보험협회 집계를 보면, 인피(人被) 사고와 부상자 수가 경찰 통계의 5배에 이른다. 물론 이 중에는 '나이롱환자'도 있긴 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만년 교통 후진국, 한국'의 배후에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이 있다고 믿는다. 1982년 자동차 및 보험 산업을 키우려고 재무부 주도로 만든 법이다. 법무부·내무부·교통부 모두 반대했다. 골자는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종합보험(혹은 공제조합)에 가입했으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선이나 횡단보도 침범, 무면허나 음주 운전 같은 12가지만 처벌한다. 요컨대 "사고 걱정하지 말고, 어서 차 구입하고 보험에 가입하라"는 것으로, 대한민국에만 있는 법이다.

교특법은 이후 35년이 흐르면서 국민적 안전 불감증과 모럴 해저드를 조장해왔다. 견인업자 횡포, 정비업체 폭리, 보험 범죄 기승 같은 부작용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폐지 요구 헌법소원만 세 번 제기됐고, 재판관 9명 가운데 과반(5명)이 위헌 의견을 냈는데도 결정 기준(6명)에 미치지 못해 유지된 적도 있다.

폐지 반대 주장의 요점은 외국처럼 경찰에 신고해야 보험 혜택을 받게 하면 경찰 업무량이 폭주하고 전과자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곳곳에 CCTV가 있고 '블랙박스'도 일반화돼 판정이 신속하고 명쾌해졌다.

교특법에 관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상습적 사고 유발자를 가려내지 못해 교통사고를 양산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피해자 아닌 가해자 보호에 치우쳤으니 교특법을 제거해 사고를 예방하자'고 권하고 있다. '없애야 할 악법'이란 것이다. '교통안전에 관한 한 대책 없는 민족'이라는 자학 뒤엔 우리가 간과해온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중 아주 중요한 것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