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밤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공연장 출구.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 '더 데빌' 공연이 끝난 지 30~40분이 지났는데도 줄이 길게 늘어섰다. 주인공인 뮤지컬 배우 임병근·박영수·정욱진의 '퇴근'을 기다리는 100여명의 팬들이었다. 20~3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우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자 팬들은 일사불란하게 '촬영팀' '선물 전달팀'으로 나뉘어 배우를 맞았다. 전문가용 카메라를 든 '촬영팀'의 플래시가 잇달아 터졌다. 배우에게 선물을 주거나 사인을 받고 셀카를 찍는 팬들의 환호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소극장 공연이 많은 대학로에선 거의 매일 밤 이런 이벤트가 열린다. 이름하여 '퇴근길'. 배우들이 퇴근하는 길목에서 팬들과 만나는 '팬 서비스'다. 직장인 김성희(36)씨는 "매일 사표 낼까 고민하는데 공연 보고 나서 퇴근길 한번 훑고 지나가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웃었다.

열성 팬은 '영업사원' 역할도

'영업사원' 못지않은 열성 팬들의 노력이 공연 시장 확대에 한몫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연에 관심 없던 이들까지 끌어들여 관객층을 넓힌다는 얘기다. 예매 경쟁이 치열하다 싶으면 친구를 끌어들여 예매에 나선다. 팬들끼리는 '용병을 모셔온다'는 표현을 쓴다. 주말 공연을 보려고 청주에서 올라왔다는 지혜정(30)씨는 "처음에 친구의 '용병'으로 시작해 입문했는데, 지금은 내가 친구들을 끌어들이는 단계가 됐다"고 말했다.

박병성 뮤지컬 칼럼니스트는 "지금의 30대는 아이돌 팬 문화를 만들어낸 '1세대'로 볼 수 있는데, 뮤지컬 애호가로서도 청소년 시절 못잖게 적극적으로 활동한다"고 말했다.

23일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는 공연이 끝나서도 배우들의 ‘퇴근길’을 기다리는 팬들로 가득했다. 일명 ‘대학로 왕자님’으로 불리는 3명의 배우들이 나오는 동선에 맞춰 ‘구역’별로 줄을 선 모습이다.

"내 공연은 내가 키운다"

열성 팬들은 프로 스포츠 '스카우터'처럼 눈에 불을 켜고 워크샵이나 리딩 연습을 비롯해 각종 공연장을 찾아다닌다. 될성부른 배우들을 적극 응원한다. 티켓 파워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대학로 왕자님' '대학로 아이돌'이 탄생한 것도 이들 덕분이다. 배우들의 몸값도 수직 상승하고 있다. 배우 김재범과 대극장과 소극장을 넘나드는 홍광호 등이 선두급으로 꼽힌다. 일부는 소극장 뮤지컬 개런티가 회당 100만원을 호가한다. 올해 '광염소나타' '라흐마니노프'에 출연한 김경수는 연말까지 6개 작품을 이미 확정했다. 박은석(제이에스픽쳐스)·윤소호(SM C&C)·이상이(좋은사람)·이창용(씨제스) 등은 유명 기획사에 소속돼 팬들을 몰고 다닌다.

최근 들어선 여배우들이나 작사·작곡가에게까지 관심 분야를 넓히고 있다. 뮤지컬 '미드나잇'에서 앙상블을 하는 박주희나 연극 '베헤모스'의 김히어라 등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작곡가 윌 애런슨, 작사가 박천휴는 팬들 사이에서 '윌휴 콤비'로, 연극 '벙커 트릴로지'로 인기를 끈 김태형 연출, 지이선 작가도 '지탱극'이란 별칭으로 사랑받고 있다. 공연 홍보사 랑의 조수곤 팀장은 "팬이 늘면서 주연은 물론 조연에 대해서까지 '발굴하는 쾌감'을 느낀다는 평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