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석 정치부 기자

[말레이시아는 어떤 나라?]

할릿 아부 바카르 경찰청장이 22일 오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경찰청 강당에 들어서자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 200여명으로 강당은 빈자리가 없었다. 쿠알라룸푸르 곳곳에서 취재 경쟁을 벌이던 기자들은 경찰이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된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이번 사건을 브리핑하는 할릿 청장으로선 긴장되고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사소한 한 마디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회견 내내 기자들을 압도했다. 한 기자가 추측성 질문을 하자 "제발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했고, 이미 말한 내용을 다시 물으면 "같은 내용 반복하지 않겠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의 면박(面駁)이 기분 나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수사 내용을 발표하면서 "확실하다" "그것은 이렇기 때문이다" "이해가 충분히 됐나"고 할 때마다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릿 청장은 이번 사건에 사실상 북한 정권이 가담했다고 볼 근거를 조목조목 댔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고 보나'라는 질문에는 "말하지 않겠다"며 선을 그었다. 증거로만 말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공동조사 요구를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선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이날 회견에 대해 "외교적으로도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침묵해야 하는지를 잘 지켰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은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준을 봤다"고 했다.

문득 한국 수사기관의 브리핑이나 회견이 생각났다. 아쉽게도 '모르쇠', 정치적 해석, 선문답(禪問答) 같은 기억들만 떠올랐다.

최근 한국 인터넷 사이트엔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 속보가 나올 때마다 '말레이시아 경찰, 속 시원하다' '우리 경찰은 왜 이렇게 못 하나'는 댓글이 추천 1위를 하고 있다.

올해 말레이시아 경찰 예산은 87억링깃(약 2조2270억원)이다. 한국 경찰 예산(10조1138억원)의 5분의 1 남짓이다. 이날 회견에서 수치로는 계산할 수 없는 말레이시아 경찰의 품격(品格)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