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旅券) 유효기간 지난 줄도 몰랐다. 그래도 알량하나마 국제화를 겪게 된다. 무엇보다 외국인을 흔히 본다. 자연히 익숙지 않은 말 듣는 일이 익숙해진 것이다. 이방인(異邦人)이 아니다 싶은데 입을 열 때는 깜짝깜짝한다. 어, 우리나라 사람 아니네? 십중팔구 중국인이다. 지난해에만 806만7722명이 이 땅에 왔다. 10년 만에 거의 아홉 배로 늘다 보니 반가운 일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들이 마구 버리고 간 여행 가방 때문에 서울 주요 관광지가 몸살을 앓고 있다. (중략) 여행사 대표 류모(43)씨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백화점·면세점뿐 아니라 쓰레기 투기에서도 단연 큰손"이라고 했다.'

유커, 그냥 관광객을 뜻하는 중국어다. 몇 년 새 부쩍 퍼지더니 특정인(特定人), 바로 중국인 관광객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국내 여행업계에서 간편히 부르느라 시작했나 본데…. '귤화위지(橘化爲枳·회남의 귤을 회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환경 따라 사물의 성질이 바뀜을 이르는 말)'라 하기에는 글쎄. 외국어를 거리낌 없이 우리말에 심은 일도, 보통명사를 멋대로 고유명사인 양 쓰는 일도 께름하다. 그럼 '투어리스트(tourist)'라 하면 영어권 관광객을 가리킨다는 말인가. 단체가 아닌 중국인 관광객을 '개별 손님'이란 뜻의 '싼커(散客)'라 이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예로는 일찍이 '영부인(令夫人)'이 으뜸 아니었나 싶다.

'그는 젊은 시절 공안 검사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74년 안기부 대공수사국 근무 시절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냈고….'

단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 영부인이다. 부인(夫人)이나 매한가지. 이걸 우리는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뜻으로 어지간히 썼다. 나라에서 한 사람만 누리던 호칭…. 남의 아들딸 높여 이르는 '영식(令息)' '영애(令愛)'도 오로지 '대통령 자녀'만을 가리켰다. 이런 잘못된 표현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독재(獨裁)의 서슬 때문이었을까. 하기는 권력 앞에선 무슨 일이든 통하는 세월이었다. 이제 그래서는 안 된다며 온 나라가 부글부글한다. 글 씀씀이에도 엉뚱한 권력은 없는지 되돌아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