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발락콩 인근 'MKP 그룹' 건물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이 회사는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무역상 한훈일이란 인물이 운영하는 곳이다. 북한의 동남아 관련 사업에 중요 역할을 하는 한훈일은 과거 김정남의 '돈줄'이기도 했다. 한씨는 김정남의 동선(動線)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이 정보가 한씨에 의해 북측에 샜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비롯한 각국의 정보 당국은 관련 내용을 추적 중이다.

한씨가 건물 1층에서 운영했던 북한 식당도 간판이 떼진 채 철제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한씨는 김정남 피살(13일) 1주일 전쯤 사무실을 비우고 사라진 것으로 전해졌다. 직원들도 출근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인근 자동차 수리점 직원은 "북한 직원 몇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건물 입구를 잠그고 간 뒤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MKP 그룹이 위치한 발락콩은 김정남이 피살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약 50㎞ 떨어진 곳으로 건축회사, 자동차 수리 공장 등이 밀집한 공업 단지다.

현지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MKP 그룹의 최고경영자(CEO)인 한씨는 이곳에서 'Edward Han'이라는 이름을 썼다. 군사 첩보 요원을 양성하는 압록강대학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한씨는 30여년 전 이곳에서 건축회사를 시작해 금융·IT·의료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왔다. MKP 건물 맞은편 건물의 한 경비원은 "(한씨 회사에) 북한 사람뿐만 아니라 현지인까지 직원이 수백 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듯 회사 인터넷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이나 사진을 올려놓지 않았다. 또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주소와 실제 사무실이 있는 곳도 달랐다. 회사 운영에 비밀이 많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다. 현지 관계자는 "한씨 회사의 1년 수입이 수백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이 가운데 상당액이 북한 김정은에게 상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한훈일의 MKP그룹 - 김정남에게 자금 지원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무역상 한훈일의 회사 ‘MKP그룹’ 사무실이 있는 쿠알라룸푸르 발락콩 인근 건물 모습. 이 건물에 있는 차량 수리점 직원은 “2주 전부터 이 회사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에서 IT 사업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김정남이 한씨 등 현지 북한 인사들과 사업 논의를 하기 위해 쿠알라룸푸르를 찾았다가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현지 관계자들 사이에선 거론된다. 한씨의 MKP 그룹 자회사인 '소싯(Sosit)'은 회계 시스템과 의료 사진 판독 프로그램을 제작·보급하는 IT 회사다. 현지 교민 A씨는 본지 통화에서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영향력이 큰 한훈일과 김정남이 IT 사업을 통해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현지 사업가들 사이에 퍼져 있다"고 했다. 또 이날 현지 경찰 발표에 따르면 김정남 살해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리정철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중국계 회사의 IT 부서에서 일해왔다.

한훈일은 김정남에게 사업 자금을 지원해준 것 등이 문제가 돼 지난해 북한에 불려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김정일의 생일 때마다 거액의 자금을 상납해 온 점 등이 참작돼 말레이시아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보 소식통은 "한씨 등이 사업을 빌미로 김정남과 만나 일정과 동선 등의 정보를 파악하고, 이를 북측에 보고한 뒤 은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