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지음|문학세계사|99쪽|1만1500원


계절은 앓고 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감기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더위와 추위는 잊혔다가, 다시 여름과 겨울이 돼서야 사실로 되살아난다. 다만 봄의 예감은 조금 다른데, 어떤 호의적인 해방과 전역의 기분이 공감각으로 사무쳐 있어 그럴 것이다.

등단 54년 경력의 시인이 평생 써 낸 700여 편 중 봄에 가장 어울릴 서정시 33편을 골라 시집으로 엮었다. "희망과 위안, 사랑과 안식의 메시지가 담긴 서정시"라고 책 보도자료에 소개돼 있다. 짧은 데다 인용이 편리한 시구가 많아 소셜미디어에서 인기가 좋다고 한다. 원로 시인이 구사하는 정통 화법엔 복잡한 수사가 없다. 시인은 키 155㎝에 몸무게 61㎏의 몸을 가졌다. 그의 문장은 그의 몸으로 걸어간다. 아담하고 조용한 발걸음이 종이 위에 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사람 살아가는 세상의 열두 달 가운데/ 어느 달이 가장 마음에 들더냐/ 하느님께서 하문하신다면요,/ 저는 이월이요,/ 라고 서슴지 않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눈바람이 매운 이월이 끝나면,/ 바로 언덕 너머 꽃 피는 봄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봄꿈을 꾸며) "지상의 시간이 끝난 사람이/ 잠자러 가는 시각,/ 인간의 이름은 모두 따뜻하다/ 이 별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별)

얼마 전 점심으로 시인과 중국집에서 기스(鷄糸)면을 시켜먹었다. 겨울 닭을 잡아 우려낸 뜨거운 국물을 목구멍으로 밀어 넘기며 더 나은 체온을 희망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