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로 떨어진 날씨에도 야외 빙판 위를 달려야 했다. 발에 맞는 스케이트가 없어 '축구화'에 날을 붙였다. 하지만 열정만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한국 피겨스케이팅 '1세대' 홍용명(85) 여사는 60여 년 전 '피겨 불모지'였던 이 땅을 그렇게 기억했다.
홍 여사는 16일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 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강릉 아이스아레나를 찾았다. '원조' 격인 그는 이날 행사에서 피겨 유망주 임은수(14) 등과 함께 무대에 섰다. 홍 여사는 "수천명 관중이 들어찬 시설 좋은 빙상장에 서니 흥분된다. 1년 앞으로 다가온 평창올림픽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며 10대 소녀처럼 웃었다.
평안남도 안주가 고향인 홍 여사는 태어나자마자 가족과 중국으로 갔다. 스케이트를 처음 신은 건 빙상부가 있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피겨'라는 단어조차 생소했지만 얼음 위에서 아름다운 동선을 만드는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해방 후 서울로 온 홍 여사는 본격적으로 얼음을 탔다. 1948년 처음 개최된 전국여자피겨선수권에서 우승한 그는 1950년대엔 전국빙상경기대회에서 3연패를 차지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피겨를 스포츠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홍 여사는 "훈련을 하고 있으면 '서커스냐' '짧은 치마 걸치고 뭐하는 거냐' 같은 차가운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남녀가 짝을 이루는 '페어' 종목 연습을 할 때 '풍기문란죄'로 단속하는 경찰도 있었다. 홍 여사는 "야외 훈련이 힘들어 실내 빙상장 하나 있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 같지만, 지난 60년 사이 피겨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달라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도자가 돼 사비를 털어 선수들을 국제대회에 보냈고, 함께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렇게 키운 제자 중 하나가 '피겨 여왕' 김연아의 스승 신혜숙(60) 코치였다.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미국) 동계올림픽 때 홍 여사는 감독이었고, 신 코치는 출전 선수였다.
한국 피겨의 '과거'에게 '미래'를 물어봤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을 실감해요. 저는 말 그대로 맨땅에 머리를 박으며 도전했지만, 이젠 김연아를 비롯한 많은 후배가 빛을 내고 있잖아요. 한국 피겨는 실력은 물론 피겨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 세계 정상급이에요. 언젠간 우리가 다시 세계 최고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