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로 떨어진 날씨에도 야외 빙판 위를 달려야 했다. 발에 맞는 스케이트가 없어 '축구화'에 날을 붙였다. 하지만 열정만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한국 피겨스케이팅 '1세대' 홍용명(85) 여사는 60여 년 전 '피겨 불모지'였던 이 땅을 그렇게 기억했다.

홍 여사는 16일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 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강릉 아이스아레나를 찾았다. '원조' 격인 그는 이날 행사에서 피겨 유망주 임은수(14) 등과 함께 무대에 섰다. 홍 여사는 "수천명 관중이 들어찬 시설 좋은 빙상장에 서니 흥분된다. 1년 앞으로 다가온 평창올림픽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며 10대 소녀처럼 웃었다.

왼쪽 사진은 지난 1955년 전국빙상경기대회에 출전한 홍용명 여사가 야외 빙판에서 연기하는 모습이다. 오른쪽은 16일 열린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관중에게 손을 흔드는 홍 여사.

평안남도 안주가 고향인 홍 여사는 태어나자마자 가족과 중국으로 갔다. 스케이트를 처음 신은 건 빙상부가 있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피겨'라는 단어조차 생소했지만 얼음 위에서 아름다운 동선을 만드는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해방 후 서울로 온 홍 여사는 본격적으로 얼음을 탔다. 1948년 처음 개최된 전국여자피겨선수권에서 우승한 그는 1950년대엔 전국빙상경기대회에서 3연패를 차지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피겨를 스포츠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홍 여사는 "훈련을 하고 있으면 '서커스냐' '짧은 치마 걸치고 뭐하는 거냐' 같은 차가운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남녀가 짝을 이루는 '페어' 종목 연습을 할 때 '풍기문란죄'로 단속하는 경찰도 있었다. 홍 여사는 "야외 훈련이 힘들어 실내 빙상장 하나 있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 같지만, 지난 60년 사이 피겨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달라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도자가 돼 사비를 털어 선수들을 국제대회에 보냈고, 함께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렇게 키운 제자 중 하나가 '피겨 여왕' 김연아의 스승 신혜숙(60) 코치였다.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미국) 동계올림픽 때 홍 여사는 감독이었고, 신 코치는 출전 선수였다.

한국 피겨의 '과거'에게 '미래'를 물어봤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을 실감해요. 저는 말 그대로 맨땅에 머리를 박으며 도전했지만, 이젠 김연아를 비롯한 많은 후배가 빛을 내고 있잖아요. 한국 피겨는 실력은 물론 피겨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 세계 정상급이에요. 언젠간 우리가 다시 세계 최고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