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국제부 차장

20년 전인 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鄧小平)이 93세로 사망했다. 당시 중국 매체는 그에게 '융추이부슈(永垂不朽·영원불멸)'란 수식어를 붙였다. 빈곤에 허덕이던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부활시킨 공로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의미였다.

덩을 '영원불멸'하게 만든 개혁·개방의 시작은 경제 분야가 아니었다. 과학과 교육이 먼저였다. 마오쩌둥에게 세 번째 숙청을 당했다가 1977년 다시 일어선 그는 교육부 간부들부터 불렀다. 그리고 "과학과 교육 업무를 책임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나는 이 자리를 지원했습니다. 우리가 이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중국 현대화는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에즈라 보걸 책 '덩샤오핑 평전' 인용)라고 했다. 문화대혁명 때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몰려 화장실 청소부 등으로 쫓겨간 과학자들이 대거 복권됐다. 대학 입시도 10년 만에 재개됐다. 문혁 시기엔 노동자·농민·군인 중 공산당 추천을 받은 사람이 대학생으로 선발됐다. 덩은 중국을 다시 일으키려면 '홍(紅·공산 이념)'보다 '전(專·전문 지식)'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과학과 교육을 본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에야 연안 도시를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 중국 최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2차 대전 때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나라지만 중국을 재건하려면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는 일본 기자회견장에서 중·일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영유권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장내가 긴장했다. 덩은 "이 문제를 후대에 넘기면 좋겠다. 그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총명해 능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장내에 감탄사가 터졌다.

중국 광둥성 선전시 시내에서 시민들이 덩샤오핑(鄧小平)과 선전의 전경이 그려진 간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1991년 8월 구소련 부통령이던 겐나디 야나예프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련 해체를 부르는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 일부 간부는 야나예프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덩샤오핑의 대답이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였다. 1974년 덩은 유엔 연설에서 "중국은 결코 패권을 부르짖지 않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 다른 나라를 탄압하거나 착취한다면 전 세계, 특히 개발도상국들은 중국을 '사회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타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일전쟁과 국공(국민당·공산당) 내전, 문혁을 모두 헤쳐온 덩은 개방과 평화만이 중국 발전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마오쩌둥의 시신은 방부 처리돼 톈안먼광장의 마오주석기념관에 안치됐다. 반면 덩은 기념관이 없다. 그의 유언에 따라 각막은 안과 연구용으로, 장기는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됐다. 화장된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죽어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실천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한국을 압박하는 중국 지도부도, 나라 구하겠다고 출마한 우리 대선 후보들도 덩샤오핑을 한 번쯤 돌아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