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이번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고문으로 위촉됐다가 스스로 사퇴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의 발언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아내인 성신여대 심화진 총장의 교비 횡령 혐의에 대해, 그런 비리를 저질렀다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라는 말로 심 총장의 무죄를 주장했다. 진정한 군인인 자기가 아내를 살려둔 것은 아내가 결백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계백 장군 흉내 내기라면 매우 어쭙잖다.

그는 계백 장군처럼 초법적으로 가장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하는 것이 군인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임하기 전에 가족을 죽인 것은 가장으로서 생살여탈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고 백제의 멸망이 확실한 상황에서 패장의 가족이 적들에게 당할 치욕을 막으려는 비장한 결단이었다.

공화정 시대 로마를 비롯한 수많은 전근대 국가와 사회가 가장에게 가족 생살여탈권을 부여했다. 가장에게 그토록 강력한 지배·통솔권이 있다면 책임도 그만큼 중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가족의 죄에 대해서 가장이 대신 벌 받도록 한 사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가장은 권리만, 가족은 의무만 지녔던 것이다.

문재인 전 대표 측에서 '깜짝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10일 각종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연수를 받던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4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평화의전당에서 열린 문 대표의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 북콘서트에 참석한 전 전 특전사령관(오른쪽).

서양은 기독교화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와 함께 여성의 지위가 크게 향상됐다. 그래서 중세 서양 문명의 꽃이었던 '기사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여성에 대한 공경 계율이다. 어렸을 때 서양 영화를 보면 아내에게 딴 애인이 생기면 서양 '신사'들이 아내를 닦달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은밀히 상대편 남자를 죽이는 것이 너무 놀라웠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근거 없는 의처증으로 아내를 들볶고 학대하는 것과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영화 속 서양 남자들의 행동이 전형적인 것도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에게 서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사랑의 진수는 어떤 것일까? 영국의 문호 디킨스가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는 시드니 카튼이라는 냉소적 알코올중독자가, 루시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된 뒤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 오른다. 좀 비현실적인 듯하지만 런던의 지가(紙價)를 올렸던 작품이다. 전인범 전 사령관에게 아내 대신 형을 살 수 있겠는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