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예약해놓고 안 오시는 분들 때문에 정말 급한 환자들이 피해를 봐요."

지난 10일 오후 2시 서울의 한 대형 종합병원 내과 진료실 앞. 원래 2시에 예약한 환자 5명의 이름을 부른 간호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5명 중 2명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이 병원 내과 진료실 18곳의 2~3시 예약 환자 145명 가운데 18명(12.4%)이 오후 3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환자가 몰려드는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에 '노쇼(No-Show·예약 부도)'가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5대 종합병원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외래환자의 예약 부도율은 10.2%에 달했다. 예약 부도율이 15%인 병원도 있었다. 5대 종합병원은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가나다 순)을 말한다.

[No-show 사라진 양심 '예약 부도' ]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환자들 가운데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러 병원에 중복으로 예약한 뒤 자기 입맛에 맞는 병원 한 곳만 찾는 얌체 환자도 상당수라고 한다.

안과 진료를 받기 위해 지난 9일 부산에서 서울대병원을 찾은 김모(여·57)씨는 진료를 받던 중 다른 종합병원 간호사에게 "언제 오시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김씨는 이날 서로 다른 종합병원 3곳을 예약한 뒤, 서울대병원만 찾은 것이다. 다른 병원들에 예약 취소 전화도 하지 않았다.

예약을 지키지 않고 뒤늦게 찾아와 다짜고짜 진료를 받게 해달라는 환자도 있다. 지난 10일 서울 한 종합병원 호흡기내과를 찾은 장모(45)씨의 원래 예약일은 3일 전인 7일이었다. 장씨는 예약을 연기하지도 않고 무조건 진료를 요구했지만, 이미 환자 7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씨는 20여분간 소리 지르며 난동을 부리다 병원 경비원들에게 제지당했다.

종합병원이 아닌 일반 병·의원들도 예약 부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병원들은 예약 부도를 감안해 실제 진료 가능 인원보다 20% 정도 더 예약을 받는 '오버부킹(over-booking)'을 받기도 한다. 서울 강남에 있는 대기업 사원 김모(여·32)씨는 이달 초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근처 치과에 예약하고 갔다가 허탕을 쳤다. 예약 시각보다 10분 일찍 도착했지만, 과다 예약된 환자들 때문에 40분을 기다리다 그냥 돌아온 것이다. 이 병원 관계자는 "예약금이나 위약금을 부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오버부킹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병원 노쇼'는 결국 다른 환자의 진료 기회를 빼앗게 된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안과 예약을 하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뒤에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류마티스내과나 유방암 관련 진료를 받으려면 교수에 따라 최소 3~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 정모(59)씨는 "통증이 심해 급하게 진료받아야 하는 환자들도 진통제를 먹으며 참다가 예약날에 오는 경우가 많다"며 "노쇼가 이런 환자들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셈"이라고 했다.

의료계에서는 예약 부도 환자에 대한 위약금 부과 등 제재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서울대병원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전국 20세 이상 성인 남녀 9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0.6%가 '예약 부도 예방을 위한 위약금 부과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위약금에 찬성한 응답자들은 대부분 '결국은 내가 피해를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이유를 꼽았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공공보건의료사업단장은 "'병원 노쇼'와 관련해 위약금 도입이나 다음 진료 예약 페널티 부과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