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의 독무대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는 26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리는 제89회 미 아카데미 시상식 이야기다. '라라랜드'가 1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기선을 잡았지만, 한 해 할리우드 최고 영화를 뽑는 작품상 경쟁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만만찮은 경쟁작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감독 케네스 로네건)와 '문라이트'(감독 배리 젱킨스)는 각각 15일과 22일 국내 개봉을 앞뒀다. 22일 개봉하는 멜 깁슨 감독의 전쟁영화 '핵소 고지'에다, 현재 상영 중인 '컨택트'(Arrival)와 '라이언'까지, 우리 극장에 미리 보는 오스카 작품상 경연이 펼쳐지고 있다.

'문라이트'

골든글로브 드라마 작품상을 포함, 56개 시상식에서 152개의 상을 받았다. 평단의 열광적·일방적 지지를 받은 작품답게, 이 영화는 고요하게 마음을 흔든다. 뛰지 않아도 숨이 가쁘고, 울지 않아도 먹먹하다.

흑인 소년의 성장기이자 한 생에 단 한 번뿐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문라이트’. 주인공‘샤이론’을 나이에 따라 다른 세 배우가 연기하는데, 한 남자의 성장 과정인 듯 자연스럽다.

홀어머니 슬하의 흑인 소년 샤이론. 작고 약하고 동성애자처럼 걷는 그를 모두가 '리틀'이라 부른다. 엄마는 마약 중독. 역시 마약상이지만 약 파는 걸 부끄러워할 줄 아는 남자 후안은 소년을 본래 이름으로 불러주고, 수영도 가르쳐 주며 말한다. "네가 뭐라고 불릴지는 네가 정하는 거다." 영화는 소년이 자라며 갖게 되는 세 이름, '리틀' '샤이론' '블랙'의 세 장(章)으로 나눠 삶의 행로를 따라간다.

푸른 달빛 아래선 흑인의 피부도 평등한 파란색으로 물든다. 하지만 낮의 햇빛은 너무 선명해 추한 현실을 발가벗기고, 밤의 오렌지빛 가로등 아래선 마약과 성의 매매가 이뤄진다. 소년은 사랑을 만나지만 배신당하고, 또래의 폭력에 희생되며, 다른 흑인들처럼 미국 사회의 위태로운 가장자리로 내몰린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다시 푸른 달빛 아래 설 수 있을까. 뉴욕타임스는 이 영화를 "빛과 음악, 생생한 인간의 얼굴로 쓴 시(詩)"라고 했다. 상영 시간 111분, 이하 세 편 모두 15세 이상 관람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말수 적고 자기 파괴적이며 주먹다짐 벌이기 일쑤인 '리'(케이시 애플렉). 미국 뉴잉글랜드의 고향 소도시를 떠나 주변과 단절된 채 살던 그에게 심장병을 앓던 형의 부고가 도착한다. 유언장에 따라 조카를 떠맡아야 하는데, 그는 어떻게든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카메라는 평범했던 과거와 황량한 현재를 담담히 보여주다, 마침내 리를 망가뜨린 절망의 실체를 폭로하며 감정의 폭주를 시작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사는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다.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도 있다. 그러나 끝내 용서받거나 용서할 수 없다 해도, 자신과 세상을 이어줄 아주 짧은 희망의 끈만 있다면 사람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망가진 부분을 안고도 아닌 척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라면, 감정의 벽 한쪽을 단숨에 뚫고 들이닥치는 이 영화의 힘에 놀랄 것이다. '헉' 하며 가슴을 움켜쥐기도 여러 번. 전미비평가협회상 4관왕(작품·각본·남우주연·신인남우상) 수상작이다. 137분.

◇'핵소 고지'

총 잡기를 거부하면서도 전투부대 의무병으로 참전해 전우 75명의 목숨을 구했던 오키나와 전투 영웅의 실화. 배우로 더 유명한 멜 깁슨 감독작이다.

'핵소 고지'.

[아카데미 시상식이란?]

사실적인 전쟁 묘사는 매력적이고, 기승전결이 확실해 이야기도 쉽다. "제발 한 명만 더 구하게 해주소서" 기도하며 지옥 같은 전장으로 달려나갈 때면 뭉클하다. 하지만 신(神), 평화, 사랑에 관해 말하는 영화가 꼭 이래야 했나 싶을 만큼 잔인한 장면도 많다. 직설적인 종교적 메시지도 거슬릴지 모른다. 전쟁 영웅담과 기독교 세계관에 익숙한 미국에선 흥행과 비평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13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