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정호승 지음|창비|170쪽|8000원

시인만이 "나는 요즘 개똥을 눈다"(근황)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마라/ 나는 이제 얼굴이 없다"(거울에게)고 자조할 수 있다. 스스로를 거절하는 이 참혹한 자학은 그러나 허점을 향한 따스한 응시로 나아간다. "봄이 와도 꽃은 다 피어나지 않는다/ 별이 다 빛나지 않음으로써 밤하늘이 아름답듯이/ 나도 내 사랑이 결핍됨으로써 아름답다."(결핍에 대하여)

1973년 데뷔한 저자의 열두 번째 시집. 수록작 대부분이 미발표작이다. 격정 대신 관조적 차분함, 정갈한 언어 배치, 동어의 반복과 변주의 운율, 수선화와 어머니와 이별과 용서 등 즐겨 사용하는 시적 이미지까지 지금껏 저자가 꾸준히 열어 온 묵적(默寂)한 시 세계를 보여준다. 표제작이 이를 웅변한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저자의 시는 읽기 쉽고, 인기가 높지만, 때문에 평단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 출간을 돕고 시집 제목도 골라줬다는 문학평론가 염무웅씨가 해설을 통해 한마디 했다. "그의 시집들은 마치 종단 바깥에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재야의 스님처럼 문단의 침묵을 딛고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다… 창비에서 발행한 그의 시집 대부분이 20쇄 이상 찍은 것으로 나타나있다. 아주 드문 일이다. 문학비평가들의 전문적 평가가 현실 독자의 이 같은 반응을 외면한다면 그 전문성은 의심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