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著者)와 역자(譯者). 이번엔 앞이다. "역자를 원작자 아래로 보는 시선은 불쾌하죠. 그러니 이번 소설은 '나도 쓸 수 있다'는 창작 선언입니다."

최근 17년 만의 새 장편소설 '아홉 대의 노트북'을 내놓은 박명애(56)씨가 말했다. 1993년 '문학사상'으로 데뷔한 그는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이듬해 중국으로 가 1998년부터 번역에 매달렸다. "한국 문학이 북한 문학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에 충격을 받아 시작하게 됐죠." 제목 '아홉 대의 노트북'은 중국에서 번역가로 활동한 15년 동안 갈아치운 노트북 숫자. 처음 만나는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에게 감동을 주려고 모옌의 책 수십 권을 사간 일, 출판사에서 계약금 대신 3만5000위안(약 600만원)어치 책을 받는 바람에 그걸로 침대를 만들던 일화 등이 소설에 녹아 있다. 등장인물도 이름만 바꿨을 뿐 최수철·모옌·류전윈 등 모두 실존 인물이다.

소설가 겸 번역가 박명애씨는“한국에선 번역가를 창작자보다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번역가의 공로 없이는 해외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술자리 등에서 틈틈이 적은 메모를 바탕으로 6개월간 매달려 썼다"고 했다. 현실에 기반하다 보니 소설엔 황당한 중국식 관행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에선 소설에 마오쩌둥의 어록을 한 줄이라도 녹여야 주류 문단에 진입할 수 있어요." 편집장이 맘대로 글을 바꾸기도 한다. "최수철의 '무정부주의자의 사랑'을 번역해갔더니 문체가 딱딱하다면서 시(詩)처럼 부드럽게 손을 보겠다더군요. 결국 그렇게 바뀌었죠." 이념적이거나 민중 의식을 자극하는 소설은 불가. "출판사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가져갔더니 단박에 표정이 구겨지더군요." 한국문학번역원 등을 통해 번역 지원금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중국 출판사 중엔 "한국에서 돈 대주지 않으면 출간 안 한다"며 어깃장을 놓는 곳도 많다고 한다. "발로 뛰면서 출판사 직원과 '관시(關係)'를 만드는 것도 번역자의 업무 중 하나예요."

박씨가 번역한 한국 장편만 10편인데 이 중 5편이 최수철 소설이다. "중국 작품은 웅장하고 서사적인 반면 한국 작품은 섬세하다는 평이 많아요. 특히 최수철 소설은 유럽 소설 같다며 인기가 좋죠. 한 우물을 파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선 대륙을 공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독자 규모의 체급이 다르죠. 난관이 많은 만큼 번역자의 정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박씨는 최수철의 '침대'를 중국어로 옮기는 동시에 차기작 '아홉 사람의 그림자'를 집필 중이다. "이번 소설은 중국의 안 좋은 면을 부각한 것 같아요. 차기작을 통해 따뜻하고 소박한 풍경도 보여주고 싶어요." 작년에 마련한 열 번째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