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기 TV조선 시사Q 앵커

방송국 분장실에서 만난 야권 원로에게 불쑥 물었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으세요?" 대화 중에 그가 "역대 안경 낀 대통령은 없었다"고 했다. 정말 그런가? 건국 이래 대통령은 총 11명. 윤보선·최규하 두 분이 안경을 썼지만 윤 대통령은 내각제하의 대통령, 최 대통령은 과도기 대통령이라 지금 통념의 대통령상(像)과는 거리가 있다. 나머지 아홉 분은 대통령 당선 당시 안경을 안 꼈다. 전두환·김영삼·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안경을 쓰곤 했지만 취임 이후였다. 적어도 대권(大權)을 거머쥔 시점 기준으로 "안경 낀 대통령은 없다"는 말은 맞는다.

미국은 20세기 들어 트럼프 대통령까지 20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이 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슨, 트루먼 세 사람만 안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안경 착용 비율이 15%다. 작년 9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단체 사진도 살펴보니 20명 중 안경 쓴 이는 4명으로 20%에 불과했다.

안경 낀 지도자가 드문 이유가 있을까. 골상학 권위자에게 물어보니 "안경은 관료나 전문가를 상징하는 소품이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데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대선은 과거 평가보다 미래 비전에 표를 던지는 선거라 진취적 리더 연출에는 안경을 끼지 않는 것이 낫다는 대통령학 전문가의 분석도 있었다. 대중과 눈 맞추고 소통하는 데도 맨눈이 유리하다고 한다.

하지만 강점을 뒤집으면 약점이 되는 게 세상만사 이치다. 안경은 강렬한 카리스마 대신 부드러운 안정감과 신뢰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인도의 국부(國父) 간디가 쓴 동그란 안경이 내뿜는 온화함을 생각해보라. 둥근 안경을 낀 백범 김구도 신뢰감을 줬다.

지금 대선 주자들도 안경파와 비(非)안경파로 나뉜다. '안경파'인 문재인·안희정·이재명 세 주자는 민주당 내 각축전, 황교안 대행은 출마설이 모락모락, 반기문 전 총장은 중도 포기, 유승민 의원은 암중모색 중이다. '비안경파' 안철수·남경필·손학규 세 주자의 권력의지도 확고하다.

'안경 낀 당선자는 없다'는 경험칙을 미래에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 ~한 대통령이 없었다"를 깬 대통령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대통령이 있었고 비록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첫 여성 대통령도 나왔다. "역사는 기록되는 게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란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말처럼 구질서는 신질서에, 선례는 새로운 선례에 언젠가 자리를 내주기 마련이다.

사실 안경 착용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국가 발전의 기회를 매처럼 민첩하게 낚아채는 안목과 분열된 사회를 하나로 봉합하는 혜안(慧眼)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