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빨리 대피하세요!"

지난 6일 오후 6시 30분쯤 전남 여수시 학동 시청사 앞 버스 정류장에 정차한 81번 시내버스(오동운수) 안에서 불길이 치솟자 운전기사 임정수(47·사진)씨가 이렇게 소리쳤다. 버스는 퇴근한 직장인, 수업을 마친 학생 등 귀갓길에 오른 승객 40여명으로 차 있었다. 그런데 이 버스에 오른 문모(69)씨가 불을 지른 것이다. 문씨는 보자기에 든 18L들이 용기 2개의 뚜껑을 열고 인화성이 강한 시너 15L를 바닥에 쏟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임씨는 운전석 뒤쪽에 강한 불길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불이야" 소리 지르며 버스 앞뒤 문을 개방했다. 그는 "회사에서 '비상시엔 먼저 버스를 세우고 앞뒤 문을 열어 승객을 대피시키라'는 안전 교육을 매달 받았다"며 "화염이 일렁이는 걸 보고 겁이 덜컥 났는데 그 순간 교육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승객) 선구조·구호' '(기사) 후탈출'이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말했다.

지난 6일 오후 6시 30분쯤 전남 여수시청 앞 정류장에서 승객 문모(69)씨가 불을 질러 전소된 버스를 소방당국이 수습하고 있다.

방화 2~3분 만에 버스는 완전히 화염에 휩싸였다. 탈출 과정에서 승객 4명이 연기를 마시고 3명이 발목과 허리를 다쳤지만 크게 다친 이는 없었다. 임씨는 "승객이 모두 무사히 대피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득희 여수경찰서 형사과장은 "버스기사가 정말 대처를 잘했다. 단 몇 초 만에 불길이 커지는 아찔한 순간이었다"며 "통유리 창문에 뒷문이 없는 관광버스였다면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동운수 버스기사 100여명은 매달 1회 이상 화재와 교통사고 등 비상시 대처 요령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최근엔 작년 10월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화재 사고 사례를 교육 내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관광버스 기사는 콘크리트 방호벽을 들이받은 충격으로 불이 붙은 버스와 승객을 내버려두고 먼저 빠져나갔고, 승객 10명이 숨지는 참사가 빚어졌다. 오동운수 업무팀 관계자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기사는 승객을 모두 구하고 제일 마지막에 대피해야 한다. 이 대원칙을 모든 안전 교육에서 제1순위로 강조한다"고 말했다.

여수시청 공무원들도 사고가 참사로 이어지는 걸 막는 데 힘을 보탰다. 사고 버스에 있었던 여수시 공무원 남경현(여·31)씨는 탈출하자마자 인근 청사 건물로 달려가 공무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퇴근을 준비하던 김철식(50)씨 등 공무원 20여명이 소화기 5대와 옥내 소화전의 소방 호스로 초기 진화에 나섰다. 이 버스는 압축천연가스(CNG) 차량으로 연료통이 차량 밑부분 중간에 있다. 연료통이 불에 노출되면 폭발할 위험이 크다. 화재 신고 3분 만인 오후 6시 36분 현장에 도착한 소방 당국은 오후 6시 46분 불을 껐다. 여수소방서는 "여수 공무원들이 아니었으면 연료통이 터져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81번 버스기사 임씨는 승객들이 대피하는 소란을 틈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방화범 문씨를 목격했다. 임씨는 버스 앞문으로 내린 다음 도주하는 문씨를 100여m가량 쫓아가 붙잡았다.

문씨는 3년 전 방화 미수로 교도소에 갇혔다가 지난달 출소하고 이번에 또 불을 질렀다. 여수경찰서는 현존자동차방화치상 혐의로 문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문씨는 경찰 조사에서 "토지 보상금 문제의 불만을 세상에 알리려고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방화를 사전에 계획한 문씨는 사건 현장에서 300여m 떨어진 한 페인트 가게에서 시너를 산 것으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