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4월 21일 낮 서울 서대문구 금화산 중턱에 박정희 대통령, 김현옥 서울시장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서민을 위해 지은 '금화 시민아파트' 17개 동의 입주식이 국가적 행사처럼 열렸다. 대통령과 내빈들은 입주민 1000여명과 함께 단지를 돌아봤다. 1968년 말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서울시장이 "1971년까지 시민아파트 2000동을 짓겠다"는 획기적 계획을 발표한 후 1호로 준공된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1969년 4월 21일 열린 서울 서대문구 금화 시민아파트 입주식. 박정희 대통령 등 귀빈과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고 있다.

당시 도시인 중 무주택자가 54%나 됐을 만큼 집 문제는 심각했다. 정부의 해결책이 시민아파트였다. 건립 첫해인 1969년에만 총 406동, 1만5840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활동을 좀 더 과시하려고 했는지 그해 5월 15일 하루에만 시내 동숭동·전농동·정릉 등 16곳에서 아파트 기공식이 동시다발로 열렸다. 모든 기공식에 시장 혹은 부시장이 참석하도록 행사 시각을 잡다 보니 캄캄한 밤이 돼서야 삽질이 모두 끝났다. '불도저'란 별명의 김현옥 시장은 공사도 초스피드로 밀어붙였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4~6개월이면 끝났다. 정권이 시민아파트에 그토록 힘을 쏟은 까닭은 3선 개헌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란 비판도 있었다(조선일보 1970년 4월 9일자).

안타깝게도 시민아파트는 시민의 장밋빛 보금자리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 가파른 산 중턱에 세워져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산동네 판자촌을 허문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이유가 또 있었다. 서울시 간부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아파트를 지어야 하느냐"고 묻자 김 시장이 "이 바보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고지대 아파트여서 수돗물도 제대로 안 나왔다. 푹푹 찌는 폭염 속 수돗물을 서로 더 쓰려는 주민끼리 한밤중 두 편으로 갈려 패싸움을 벌인 끝에 4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태까지 터졌다. 연탄가스가 방으로 역류해 사망 사고도 잇따랐다. "차라리 추운 게 낫겠다"며 엄동설한에 창문을 활짝 열고 잠을 잔 입주민도 있었다.

결국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주민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아파트 붕괴 참화가 터졌다. 졸속과 날림과 부정으로 얼룩진 전시 행정의 예정된 결말인 셈이었다. 가수 조영남은 붕괴 사고 다음 달인 5월 24일 시민회관 공연 중 '신고산타령'의 가사를 "신고산이 우르르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로 즉흥적으로 바꿔 불렀다가 형사들에게 끌려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와우아파트 참사를 끝으로 시민아파트 건설은 중단됐고, 건립된 아파트들도 10여년간 차례차례 철거됐다. 그렇게 시민아파트는 모두 사라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남아 있다. 47년 된 서울 중구 회현제2시민아파트는 2006년 안전 문제로 철거 결정이 내려졌지만 보상금 등을 둘러싼 주민과 서울시의 의견 대립 때문에 11년째 그대로 서 있다고 한다. 어디서도 찾기 힘든 을씨년스럽고 낡은 분위기 때문에 사진작가와 영화·드라마 제작진이 찾는 촬영 명소가 되고 있기도 하다. 서울시는 이 건물을 예술 창작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재건축을 하든 리모델링을 하든 산업화 시대의 역사와 한국인의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마지막 시민아파트 흔적 일부라도 보존하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