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용문시장의 한 도넛 가게에서 이랑주(45)씨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찹쌀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다. 도넛 찬사가 이어진다. "이렇게 쫄깃쫄깃한 찹쌀도넛 먹어봤어요? 손으로 찢으면 치즈처럼 길게 늘어져요. 25년간 사장님이 직접 손으로 반죽했대요. 사장님 손가락 휜 거 봐요. 자식들 먹인다고 생각하고 만든대요. 그런데 이 집 장사가 안됐어요. 가격표도 없이 단골들만 알아서 돈 내고 갔대요. 그래서 작년에 제가 나섰어요. 눈에 확 띄게 도넛 색처럼 노란 간판, 테이블, 가격표를 만들고 이 집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음식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진도 걸었어요. 그리고 이 집이 대박 났어요."

이랑주 VMD 협동조합 이사장은 재래시장 상점 디자인과 상품 진열을 바꾸는 일을 한다. “제가 시장 운명을 바꾸고 있대요. 하지만 시장이 제 운명을 바꾼 거죠.” 이 이사장이 서울 용문시장의 한 도넛 가게 앞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자기 집 대박 난 것처럼 신나게 수다 떠는 이씨는 한국 VMD(비주얼머천다이징) 협동조합 이사장이다. VMD란 매장 디자인이나 상품 진열로 사업이 잘되게 하는 일을 뜻한다. 이씨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백화점에서 VMD 일을 하다 이후 전국 재래시장을 돌며 수천여개 상점의 얼굴을 바꿔왔다.

이로운 가게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간판 새로 걸고 상품 진열만 바꿔도 매출이 오르는군요.

"겉모습만 바꿔선 오래 못 가요. 25년간 정직하게 도넛을 만들어온 정성을 보여주니까 대박이 난 거겠죠. 사람들은 '재래시장에 좋은 물건이 없어서 안 간다'고 얘기해요. 그런 걸 만들어 팔고 있는데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이런 점포를 세상에 알려주고 싶어요."

―죽어가는 가게도 살리는 '미다스의 손'이라고 하던데요. 이 대표가 컨설팅한 가게 매출이 평균 10~30% 오른다고요.

"제가 이렇게 바꾸자고 점포 100곳에 제안했을 때 실제로 변하는 데는 10곳 정도예요. 대를 이어서 장사하거나 고생하면서 생업을 이어온 분들 가게는 더 바꾸기 힘들죠. 컨설팅해도 전부 잘되는 것은 아니고요."

―100% 성공하는 건 아니네요.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이 된 사장님들이 성공하는 것 같아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우려고 하다가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이로운 가게만 도우려고 합니다."

―이로운 가게는 어떤 건가요.

"이로운 물건을 파는 곳이죠. 농약이 많이 든 중국산 나물을 팔고 싶은 가게는 못 도와드려요. 요새는 의뢰받을 때 먼저 얘기해요. '사장님이 파는 물건이 세상을 이롭게 해야 도와 드립니다'라고요."

도넛 가게 주인이 "이 이사장님, 이것도 한번 잡숴봐" 하며 꽈배기를 건넸다. 이씨는 사양 않고 한입에 먹었다. "시장 가면 사장님들이 수고한다고 커피며 박카스며 주세요. 저는 다 받아먹어요. 그래야 더 빨리 마음이 통해서 제대로 컨설팅할 수 있으니까요. 시장 오면 제일 먼저 화장실 위치부터 알아놔요. 제가 장(臟)이 예민한데 급하면 빨리 뛰어가야 해서요."

―백화점에서 오래 일했으니까 시장 화장실이 좀 꺼려졌을 것 같은데요.

"전혀요. 한번은 시장에서 청소하는데 제 스웨터 안으로 바퀴벌레가 들어간 적이 있어요. 그때 태연한 척 '어머 수놈인가 봐요.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랬죠. 쥐가 나오면 고무 대야 들고 내쫓고요. 그러니까 기 센 시장 아줌마, 할머니들도 '얘 좀 봐라' 하면서 예뻐해 주세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나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집 마당에서 돼지 30~40마리를 키웠거든요. 바퀴벌레랑 쥐가 집에 많아서 열심히 잡았지요."

구룡포 처녀, 백화점 '차도녀' 되다

이씨는 1972년 과메기로 유명한 포항 구룡포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통배로 고기 잡는 어부였고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다. 그는 "어릴 때부터 꾸미는 걸 좋아했다"고 했다. "엄마 빨간 내복을 가위로 오려서 비키니 만들어 입었다가 엄마한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고요. 큰언니 시집갈 때 준다고 엄마가 숨겨놨던 예쁜 그릇 세트를 꺼내서 밥이랑 반찬 담았다가 혼나기도 했죠." 이씨는 여상에 진학했다가 고3 때 인문계로 옮겼다.

―대학에 가고 싶었군요.

"저는 은행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주산하고 부기가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엄마한테 '나는 대학 가야겠다. 입학금만 주면 돈 10원 안 받고 내가 벌어서 다닐 테니까 허락해 달라'고 했죠. 당시 구룡포가 워낙 시골이다 보니 여상과 여고가 '종합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한 건물에 있었어요. 책상 들고 인문계 반으로 갔어요. 교실 맨 뒤에서 시험 칠 때까지 3개월 동안 청강했어요."

―VMD와 관련된 과를 지원했나요.

"아니요. 처음에는 대구교대 특수교육학과에 원서를 냈는데 떨어졌어요. 집안 형편에 재수는 할 수 없고 그래서 선린여자전문대 산업디자인과에 갔어요." 이씨는 "시험지에 땀 냄새 나도록 열심히 공부해서 전문대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했다.

이랑주 이사장이 바꾼 도넛 가게 간판 전후 모습. 과거(아래)에는 색도 산만하고 활자 디자인도 제각각이었다. 새 간판은 노란색 바탕에 활자 디자인을 통일했다.

―취직이 잘되던가요.

"저는 지방 전문대라도 수석 졸업하면 서울 가서 금방 취직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취업 사기만 3번 당했어요. 겨우 대구에서 이랜드 계약직으로 뽑혔어요. 대구에 있는 매장을 관리하는 일이었죠. 이후에 성과를 인정받아 6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왔고, 199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 VMD 일을 하는 경력사원으로 채용됐어요."

―백화점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요.

"일중독이었던 것 같아요. 며칠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고요. 점원들한테 항상 잔소리하고 일도 빡빡하게 많이 시켰어요. 별명이 '독한 언니' '시어머니'였죠. 그때 저랑 입사 동기 모두 서울에서 좋은 대학 나왔어요. 저는 빽도 없고 지방 전문대 출신이라고 무시 많이 당했어요.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죠. 입사하고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제 디자인이 백화점 본점 쇼윈도에 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전국 백화점 매장이 똑같이 다 바뀌거든요. 그때 정말 기뻤어요."

결핍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씨는 1996년 현대백화점 부산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면서 부산 동명대에서 패션 디자인학과를 다녔다. 2002년에는 롯데백화점 창원점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즈음 부산 동서대 디자인대학원에서 VMD학을 전공했다. 실무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인정받아 대학원 다니면서 같은 대학에 VMD, 패션마케팅 수업 강의도 했다. 2005년부터는 박사과정도 밟았다. 그러다 2006년 백화점을 뛰쳐나와 시장 일을 시작했다.

―왜 시장으로 갔나요.

"2005년에 중소기업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전통시장이 망해가는데 백화점에서 하는 VMD 교육을 시장 상인들에게 좀 해줄 수 있겠느냐고요. 시장 가 보니까 엉망이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체계적으로 개선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중소기업청에 역제안을 했죠. 시장 소상공인들이 무료로 VMD 컨설팅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지원(당시 한 곳당 8만원)을 해달라고요. 그렇게 시작됐어요."

―백화점에서 계속 일하는 게 더 편하고 좋지 않았나요.

"그러게 말이에요(웃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결핍 때문에 정말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돈 많이 벌고 싶었고, 학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야간대학 다니고 석·박사 학위 따려고 했죠. 백화점 처음 입사할 때 꿈이 백화점 사장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절대 안 이뤄지겠더라고요. 전문대 출신이라서 그런지 승진이 안 돼요. 시장에 가니까 다른 사람 모습에서 제 결핍이 보이더라고요. 쪼그려 앉아서 조개 까는 할머니가 우리 엄마 같았어요. 이런 분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씨는 자기 집 주소로 사업자 등록증을 냈다. '이랑주 VMD 연구소'였다. 처음엔 혼자 시작했지만 직원이 10명까지 늘었다. 일반 기업에도 강연을 나갔는데 한 달 강연료 수입만 2000만원이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잘나가셨네요.

"처음에는 안 그랬어요. 시장 일 시작하고 첫 번째로 간 부산 한 이불 가게에서 사장님한테 소금도 맞았어요. 개시도 안 했는데 이상한 여자가 와서 헛소리한다고, 재수 없다고요. 그분을 설득해서 이불 진열을 바꿨어요. 당시 겨울이었는데 따뜻한 색을 앞쪽에, 차가운 색은 뒤쪽에 무지개처럼 진열했어요. 색상만으로 온도가 3~4도 차이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난리가 났어요. 손잡으면서 홍삼차 내오고. 그때 잘할 수 있겠다 확신이 들었어요."

이씨는 2012년 3월 일을 접고 1년간 세계여행을 떠났다. "지쳤었어요.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쉼없이 달려왔는데 어느 날 심정지가 온 거예요. 심폐소생술로 겨우 살아났어요. 어느 날 한 지하상가의 망하기 직전 사장님이 '나는 지하 밖을 안 나가서 삶이 이렇게 된 것 같다'고 했어요. 그 말이 꼭 제 얘기 같은 거예요. 그래서 다 내려놓고 떠났어요."

―다시 1년 만에 시장으로 돌아왔죠.

"해외에 가도 시장밖에 안 보이더라고요(웃음). 40여개국 150개 시장을 다니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독일 뮌헨의 빅투아리엔 시장에 갔는데, 시장 관계자가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다. 역사와 전통, 문화를 전수하고 계승하는 곳이다'라고 해요. 올리브 가게에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여기는 할머니랑 엄마가 와서 올리브를 샀던 곳이야'라고 해요. 나중에 아이는 그곳에서 할머니와 엄마를 추억하게 되겠죠. 그때 생각했어요.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사람과 물건이 만나는 곳이라면,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구나. 그래, 시장을 살려보자'고요."

―어느 때 제일 보람 있나요.

"가게 사장님 삶이 달라졌을 때요. 망해가는 지하상가 사장님은 지금 상인대학 나와서 대학원도 다니신대요. 제가 가르쳐 드린 대로 페이스북으로 가게 광고하는 사장님도 많아졌고요. 전에는 1년 내내 장사만 했는데 이제 삶에 여유가 생겨서 한 달에 한 번은 쉬고 나들이 간대요. 그런 얘기 들을 때 정말 가슴 뭉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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