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신임 외교부 장관에 이정빈씨가 기용됐다. 이 장관이 처음 출근하려 집을 나설 때였다. 정의용 당시 외교부 조정관이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 장관이 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을 차관으로 두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 반기문은 이 장관보다 한 달 앞서 차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듬해 4월 반 차관이 경질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과 갈등을 빚게 했던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외교부의 C 국장이 "외교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 이렇게 물러나도 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김 대통령의 고교 후배였다. 반기문과 아무런 인연도 없었다. 많은 외교관이 그의 퇴직을 아쉬워했다. 몇 달 후 그의 복직(復職)을 자기 일처럼 기뻐한 외교관이 많았다.

▶그가 장관·차관을 지낼 때 외교부에 '반반(潘半)'과 '반반(反潘)'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반기문의 반만 해도 성공한다"는 말에 이어서 "반기문을 따라 하면 제 명(命)에 살지 못하니, 따라 할 생각 말라"는 것이었다. 그의 밑에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을 했던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어떤 난관도 깊은 물처럼 헤쳐나가는 지혜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반기문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의전수석비서관에 오른 후, 2004년 외교부 장관이 될 때까지 8년간 차관급이었다. 그러나 그가 불평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사람이 없다.

▶18년 동안 지켜본 반기문은 '비(非)정치적 인간'이었다. 사람을 한눈에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없었다. 하지만 남을 편안히 해주고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었다. '따뜻한 카리스마'로 불리며 선후배의 신뢰를 받았다. 2006년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했을 때 해외에서 근무하던 많은 외교관이 그를 돕고자 발 벗고 나선 것도 그래서였다.

▶외교부에서는 '전설'로 불렸던 반기문. 그는 유엔 사무총장직을 마친 후 지난 12일 귀국하면서부터 지옥 같은 3주를 보냈다. 어제 발표로 대선 출마 선언도 하지 못하고 사퇴한 격이 됐다. 선거 전략 미비, 정치 참모 부재, 달라진 정치 지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하며 쌓은 국제적 경험과 네트워크가 그냥 사라질까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배출한 보기 드문 인재인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든 헌신하겠다"는 어제 그의 말이 꼭 실현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