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현 상황의 연장선에서 볼 때 다음 대통령은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좌파 지도부의 일관된 기획과 전략으로 짜인 준비성과 두 번째 도전에 따른 지명도에다 ‘때마침 넝쿨째 굴러 온’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태가 날개를 달아주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주기로 이어져 온 보수·우파 대(對) 좌파·리버럴의 정권 교체 바람도 타고 있다. 무엇보다도 보수층의 분열이 좌파의 단결을 이뤄주고 있는 시점이다.

보수층은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넋을 놓고 있으면서도 문재인씨의 대통령행(行)에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다. 여론조사 독주의 시세(時勢)를 과신한 문씨가 그의 대북·대미·대일·대중 정책을 극단으로 밀고가 보수층을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되면 북한부터 가겠다"로 대표되는 문씨의 안보·외교 정책은 적어도 보수·중도층에는 기존의 것들을 뒤엎는 혁명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단순한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정권의 창출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수 성향의 국민은 그것만은 막아야겠다는 것이고 '태극기 집회'는 그런 의사의 발로라고 봐야 한다.

문제는 반기문씨 등 여권의 주자들이 이런 보수층의 절실하고 열렬한 반문(反文)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탄핵 사태로 혼쭐이 난 여권 주자들은 박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촛불 시위'를 전체 민심으로 보고 되도록 박(朴)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촛불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안전책인 줄 알고 있는 모양새다. 문씨가 이 기회에 국민적 금기였던 '대북 햇볕'과 '반미 찬물'에 이르기까지 차별화에 도전한 것에 비추어보면 여권 주자들은 문씨 측에서 흘린 '낙엽'이나 줍는 데 급급한 듯 '진보 동화(同化)'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국민에게 '보수 꼴통'이 아니라 '중도 리버럴'로 비치기를 바랐던 것일까. 박 대통령과 거리 두기에 골몰한 나머지 보수의 정통인 대미·대북의 안보 노선마저 헷갈린 것일까.

문씨에 맞서 싸우려면 문씨를 두려워하고 그의 노선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씨와 비슷해질 것이 아니라 문씨의 대척점에 서서 '문재인이 아닌 것' 즉 anything but Moon의 길로 가야 한다. 지금 박 대통령 탄핵으로 흔들리는 보수층은 박 대통령이 밉더라도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안보 노선, 반(反)북 노선은 승계하겠다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문씨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치는 범(汎)보수 후보들의 단일화다. 적절한 시기가 오면, 또 혼자의 힘으로는 문씨의 집권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선다면 여권 또는 보수층을 대변하는 주자들은 과감히 한 사람에게 힘을 모아줘야 한다. 지난 세월 단일화는 주로 야권의 무기였다. 정확한 의미의 단일화는 아니었지만 김대중은 김종필과 손을 잡고 이른바 DJP 연합으로 대통령이 됐고, 노무현은 정몽준의 사퇴(투표 전날 노무현 지지를 철회했지만)로 승리했다. 반면 이회창은 YS계와의 불화로 이인제와의 단일화를 이끌어내지 못해 패배했다. 4년 전 이기진 못했지만 문재인은 안철수와 단일화에 성공해 박근혜와 근접전을 벌였다. 단일화는 교육감 선거에서도 야권의 단골 메뉴였다. 도지사 선거에서도 그랬고 국회의원 선거 때도 야권은 처음에는 난립했다가 결국 단일화해서 여당을 물리치거나 혼을 내주곤 했다.

세월이 변해 이제는 여권이 단일화를 해야 할 국면이 됐다. 언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지 지금은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여름 전에 치러진다면 민주당에서는 문씨의 독주가 계속될 것이고 그의 승리는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다. 반면 새누리당은 후보를 못 내는 불임 정당이 될 가능성이 높고 바른정당은 반기문씨를 영입하거나 유승민 의원을 점찍을 수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출전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고 손학규씨도 모처럼 전력투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구도로는 문씨를 이길 수 없다.

민주당 이외의 인사들이 단일화를 이뤄낼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 소속 정당이나 단체들이 단일화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이 문씨의 안보·외교 노선의 국정 방향에 반대한다면 후보로서 단일화는 있을 수 있다. 공개적인 단일화가 아니더라도 사퇴라는 형식을 취한 단일화도 가능하다. 그리고 단일화를 통한 연합전선은 분권형 개헌 작업의 밑바탕이 될 수 있고 실제로 단일화에 성공해 정권 창출이 이뤄진다면 그 결합은 내각책임제 또는 이원집정부제의 시범적 모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관건은 ‘내 힘으로 안 된다면 나의 최소한이라도 공유할 사람에게 길을 내준다’는 정신이다. 보수층은 불안과 두려움을 같이 껴안아준 지도자에게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