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언론인

민심과 리더십은 나라를 작동시키는 두 동력이다.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어야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현실에선 민심과 리더십의 균형이 깨진 채 민심은 범람하는데 리더십은 간데없다. 리더십 실종과 군중 직접 행동은 자칫 무정부적 공백을 만든다. 이게 만성화되면 나라가 흔들린다.

최순실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정부·여당에 대한 군중의 저항이 촉발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태 전개였다. 화나게 하면 화가 나는 것이고, 다중이 화가 나면 광장에 분노의 불꽃이 일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불꽃이 너무 오래가면, 그래서 정치권과 국회와 미디어와 지식인들이 그것에 영합하고 장단 맞추고 눈치 보고 펌프질해대면, 그래서 대의제 민주주의·정당정치·관료제·엘리트의 리더십이 무력화되면 그땐 더 이상 통치다운 통치가 작동하는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이 그런 상황 아닐까?

정부는 존재할 뿐 이끌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국회는 광장의 군중에 아첨하고 청문회 증인에게 호통이나 칠 뿐 나라가 직면한 큰 틀의 위기엔 관심이 없다. 새누리당은 관(棺) 속에서 내분 중에 있고, 바른정당은 천하대세 이전에 보수라면서도 당명에서 보수를 지우는 일이 당면의 최대 관심사다. 국민의당과 박지원·안철수에겐 국가 대사 이전에 지지율 하락이 발등의 불이다. 반기문은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희한한 합성품을 출시했다. 이런 연금술도 있었나, 그런 게 있었다면 세계 근현대사의 숱한 혁명과 반혁명의 혈투가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대표하겠다고 하는 건 하나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한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이래서 이 나라는 지금 바깥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위험을 안겨주고 있는지는 보지 못하면서 그저 안으로만 기어들어 은둔 왕국 때의 내분, 내홍, 내전, 당쟁에만 매달려 있다. 소국(小國)이 살아남으려면 국제정치의 추이를 순발력 있게 간파해 그때그때 재빨리 어떤 흐름을 배척하고 어떤 흐름에 코드를 맞출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내부엔 그런 체크 기능을 하는 정치 행위자는 단 하나도 없다, 황교안 권한대행이 그나마 좀 챙기고 있을지….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과 조기 탄핵, 재벌 총수 구속을 촉구하는 13차 주말 촛불집회'를 마친 시민들이 재벌 구속 촉구 퍼포먼스를 하며 행진하고 있다.

바깥 큰 세상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트럼프의 미국과 푸틴의 러시아가 죽이 맞아 중국을 견제하는 국면이 펼쳐질 수 있다. 이 경우 국제정치는 닉슨의 미국과 마오쩌둥의 중국이 죽이 맞아 소련을 견제하던 때의 반대가 될 것이다. 이런 구도를 배경으로 트럼프는 김정은이 미국 본토를 때릴 대륙간탄도탄(ICBM)을 개발하겠다고 호언장담하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여러 지렛대를 활용해 중국으로 하여금 김정은의 숨통을 죄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대북 제재를 지금보다 한층 더 강화하는 방법과 대북 선제타격을 고려할 수 있지만, 그것도 만만치만은 않다는 게 케이티 헌트 CNN 기자의 분석이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안 되면 미·북 직접 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처지는 아주 어려워진다. 미·북 평화협정, 한·미 동맹, 주한 미군이 흥정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이야말로 우리 정부·여당·야권·미디어의 최고, 최대의 관심사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벌써 몇 달째 자고 깨면 온통 최순실, 정유라, 광장 시위, 청문회뿐이다. 이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중요하다. 어차피 불거진 일이니 도리 없이 거쳐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보다 몇 배나 더 막중한 국가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도 의식하면서 가야 한다. 그걸 의식하면서 가는 것하고 그러지 않으면서 가는 것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망한다. 특검과 헌재는 할 일을 하라.그러나 ‘십자군전쟁’ 하듯 하지 말고 순 법률적으로만 해야 한다. 특검 분위기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도 비친다. “국가 경제보다 정의를 앞세우겠다”야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법대로 하다 보니 정의가 구현돼야 하지, 정의를 위해 법을 쓰는 식은 종교재판에서나 있는 일이다. 야권은 시민혁명, 부역자, 국가 대청소, 불태워버리자 같은 지하드(聖戰) 용어를 자제했으면 한다. 우리가 할 바는 베르사유 궁전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문명국가의 헌법 절차를 따르는 것일 뿐이다. 새누리당과 바른정당은 허겁지겁할수록 더 초췌해지고 있다. 광장은 더 이상 권력화돼선 안 된다. ‘무한 질주 군중 파워’에 치인 국가 리더십을 시급히 추스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