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와이다 준이치 사진|문학동네|648쪽|3만3000원

"작업할 때마다 책들을 산처럼 쌓아 놓고 닥치는 대로 페이지를 뒤적이면서 일을 시작합니다. 작업이 끝난 뒤 책들을 어떻게 정리할까. 골치 아픈 문제는 책 중에서도 장래에 도움이 되는 책과, 그 일 외에는 쓸모가 없는 책이 있다는 점입니다. 책은 시대 배경에 따라 의미나 가치가 달라집니다. 고양이 빌딩〈작은 사진〉에 있는 책들도 옥석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정치·경제 관련서는 석(石)에 해당하는 경우가 압도적입니다."

이사해본 사람은 안다. 책은 단위 부피당 가장 무거운 물품. 버리자니 아쉽고 들고 있자니 비좁다. 수십만 권 책을 읽고 또 가지고 있는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76)는 책을 버리기 아까워 아예 자신만의 서재 고양이 빌딩을 세웠다. 그 역시도 판형에 맞춰 책을 진열해야 할지 내용 분류에 따라 책을 진열해야 할지 고민할 때는 평범한 애서가. 그가 20만 권에 달하는 책을 관리하며 얻은 경험담이 담겼다.

서가란 무릇 책이 끊임없이 들고 나는 살아있는 곳. 수십만 권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수업 교재로 자주 쓴다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3권 넘게 샀는데 여전히 못 찾으며 어리둥절해하는 대목에서는 엷게 미소 짓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간단하다. 다시 산다. "만일 어떤 책이 필요한데 찾아도 보이지 않으면 예전에 산 책이라 해도 또 사고 또 사고 그럽니다.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여러 권이 되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한테 주기도 합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 그는 이렇게 '책 행방불명' 사건을 즐긴다.

언론인 출신 다카시는 국내에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의 독서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여기서 밝힌 '14가지 독서법'으로 유명하다. 속독과 다독을 강조했던 그때와 달리 다카시는 이 책에서는 텍스트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공들여 텍스트를 파고든 사람과 줄거리만 알고 지나친 사람은 세상사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전혀 다르다"며 "구약성서, 장자, 플라톤 같은 고전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읽고 주석도 열심히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럽 문화를 알기 위해 성서를 읽는 것은 물론 필수지만, 아서 왕 전설이나 성배 전설도 아주 중요합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이 설화들이 유럽 문화의 다양한 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게 일목요연하지요. 예를 들면 여기 맬러리의 '아서 왕의 죽음'이 있네요. 프랑스어 원서의 제목은…."

도쿄 분쿄(文京)의‘고양이 빌딩’지하 1층에 있는 철제 서가. 책에 있는 흠집까지 그대로 담기 위해 단마다 각각 사진을 찍어 합성했다. 실제로 7단 서가다. 사진가가 약 1만 번의 셔터를 누르고서 촬영이 끝났다.

70을 훌쩍 넘긴 다카시는 경쾌하고 수다스럽다. 서가를 돌며 마치 미술관 도슨트처럼 설명을 이어나간다. 일본 도쿄에 있는 그의 서재 고양이 빌딩(지하 2층~지상 3층 건물) 지상 1층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릿쿄대학 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기독교사(史) 관련 도서로 끝맺는다.

출판산업이 예전 같지 않고, 전자책이라는 경쟁자가 생긴 지금 다카시 같은 종이책 애호가는 멸종 위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종이책의 미래를 확신한다. "책은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좋은 책일수록 텍스트나 콘텐츠 이상의 요소가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요소들이 독자적인 자기표현을 하는 종합 미디어가 됩니다. 그런 책의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을 가장 많이 사서 읽습니다. 출판업을 경제적으로도 떠받치는 사람들이지요. 이 구조가 계속되는 한, 종이책이 끝나는 날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다카시의 서재를 무려 176쪽의 컬러 사진으로 담아냈다. 사진을 찍은 와이다 준이치는 책장을 단별로 따로 사진을 찍고(이를 위해 1만 장쯤 사진을 찍었다) 이를 그럴듯하게 합성해 하나의 책장을 완성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책장 위 칸과 아래 칸을 각각 다른 시선에서 바라봐 시선에 의한 왜곡을 최소화한 조선시대 책가도(冊架圖) 회화 양식과 똑 닮았다.

조선 임금 정조(1752~1800)는 1791년 용상 뒤의 일월도를 치우고 대신 책을 그린 병풍(책가도)을 세웠다. 정조는 신하에게 "일이 많아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는 책가도를 보며 마음을 푼다"고 했다고 한다. 다카시의 서재를 담아낸 이 책은 가히 현대판 책가도. 땅값은 비싸고 집 안에 나만의 서재를 만들기란 언감생심인 시대, 애서가라면 일종의 대리만족도 느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