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만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정치사상가도 없을 것이다. 마키아벨리 하면 떠오르는 게 군주론이고 꼬리를 무는 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이고 냉혈한 군주에 대한 옹호다. 전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제를 지지하기는커녕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던 사람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것은 통치를 위해 군주가 사용하는 갖가지 위선과 기만 술책을 폭로해서 공화주의자들과 인민들이 속지 않을 지식을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군주가 이런 수작을 부리면 속셈은 이것이라고 넌지시 알려준 셈이다. 이기적이고 교활한 것을 지지한 것은 맞는다. 그러나 그것은 공익, 특히 국가 이익에 한해서였다. 그는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의 도덕적 선악을 따지지 말라고 주장했다. 정치를 윤리와 종교에서 분리하고 정치 행위를 윤리적 가치로 옭아매지 말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마키아벨리는 근대 서양 정치사의 문을 연다.

난데없이 마키아벨리를 들먹여 주말 아침 머리를 복잡하게 해드린 것은 최근의 한 신문 여론조사 때문이다. 여기서 차기 대통령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도덕성이 일등을 차지했다. 이어서 여론을 중시해야 한다는, 소통 능력이 높은 순위에 올랐다. 아니, 대선에서 무슨 성직자나 윤리 상담 교사 뽑나. 아마도 현 정부를 비판하는 부도덕성과 불통이라는 화살이 이런 반작용을 만들어 낸 것 같은데 이 정부의 문제는 부도덕이나 불통이 아니라 무능이다. 부도덕과 불통은 무능의 결과이지 그게 원인은 아닌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도덕성을 대통령의 일차 덕목이라 치자. 국내는 그렇다 치고 외교는 어쩔 건데. 가뜩이나 주변에 죄다 센 오빠들뿐이다. 도덕으로 외교 풍랑을 헤쳐나가겠다? 혹시라도 그게 되면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작년에 오바마와 아베가 2차 대전 당시 가장 크게 서로를 할퀸 히로시마와 진주만을 찾았다. 지난 일에 대한 사과? 그런 거 없었다. 진주만에서 아베는 이렇게 말했다. "용감한 자는 용감한 자를 존중한다." 풀어 보자면 용감하게 진주만을 폭격해 2403명을 죽인 일본은 용감하게 핵으로 히로시마 주민들을 날려버린 미국을 존중한다는 얘기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동맹의 핑계를 만들어 내는 게 국제 정치라는 괴물이다. 여기에 도덕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국제 정치에서 도덕은 가장 늦게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마키아벨리의 진짜 대표작인 '로마사 논고'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칭찬받을 만한가 치욕스러운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대신 양심의 가책을 제쳐놓고 조국의 생존과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 양심의 가책 팽개치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살자는 얘기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이나 소통 같은 감성이 아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로지 역사 철학과 정치 철학을 관통하는 지력(知力)과 지력(智力)이다.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한 전직 대통령의 발언은 그가 남긴 최악의 유산이다. 머리를 빌려야 할 지경이면 아파트 동대표 선거에도 나오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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