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산업2부장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옛 에버랜드) 합병에서 국민연금 못지않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집단이 소액주주들이다. 삼성물산은 당시 10만명이 넘는 소액주주가 국민연금 보유 지분(11.2%)의 2배가 넘는 지분(29.4%)을 갖고 있었다. 이 소액주주들은 전체의 75.3%가 합병 주주총회 투표에 참석해 무려 82.1%가 찬성표를 던졌다. 2개월 전 삼성이 처음 두 회사의 합병 비율을 공개할 때만 해도 한 설문조사에서 소액주주 10명 중 8명이 반대 입장을 밝힐 정도로 부정적인 기류가 강했지만, 극적인 반전(反轉)이 나타난 셈이다.

소액주주들의 결정은 삼성물산 합병을 보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특검의 프레임대로 청와대가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21개 기관 투자자들은 삼성의 보복이 두려워 합병에 찬성했다고 하더라도, 소액주주들만큼은 합병에 따른 회사의 미래 가치를 냉정하게 따져보고 결정을 내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삼성물산 전(全) 직원이 동원돼 소액주주들을 찾아다녔다고 하지만 10만명이 넘는 소액주주들을 다 만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합병에 찬성한 국민연금도 시장 컨센서스와 동떨어진 결정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2015년 7월 17일 서울 중구 삼성생명 빌딩에서 열린 제일모직 주주총회 내부모습. 이날 제일모직은 삼성물산과의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합병 이후 통합 삼성물산의 사업 흐름을 보면 소액주주들의 결정이 최상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차선책은 됐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합병 이후 삼성물산 주가가 하락해 국민연금이 3000억원대의 손실을 봤다고 주장하지만, 합병을 안 했더라면 삼성물산 주가는 더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014년 11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실패하면서 두 회사의 주가가 각각 반 토막, 3분의 1토막이 났듯이 삼성물산 주가도 폭탄을 맞았을 것이다. 실제로 합병 후 6개월도 안 돼 옛 삼성물산의 주력 사업인 건설·상사 부문에서는 해외 자원개발 사업의 부실로 3년치 영업이익에 달하는 2조6000억원을 손실 처리했고, 그 여파로 작년 내내 1000여명의 해고를 포함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이재용 부회장 스스로도 공사석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없으면 장기적으로 삼성이 할 사업이 아니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반면 옛 에버랜드 쪽 사업은 대박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바이오 자(子)회사인 삼성 바이오로직스와 바이오에피스다. 바이오로직스는 작년 11월 증시 상장으로 단숨에 시가총액 30위권에 오른 데 이어 올해 말이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 복제약 생산 공장이 된다.

만약 삼성물산 합병이 성사되지 않았더라면 외국인 주주를 규합해 합병에 반대했던 헤지펀드 엘리엇은 과거 아르헨티나를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로 몰고 간 뒤 거액을 챙겼듯이,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해 대규모 현금배당을 하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매출 200조원이 넘는 삼성전자는 사실상 외국인 주주들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소액주주든 정부 관계자든 대통령이든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