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경제부 기자

경제 관료들은 입만 열면 국가 신용 등급을 자랑한다. 세계 3대 신용 평가사 모두 우리를 일본·중국보다 높은 계단에 올려놨으니 으쓱할 만하다. 그러나 관료가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암묵적 희생을 강요당한 결과다. 왜 그럴까.

1300조원에 도달한 가계 빚은 경제 규모(GDP) 대비 89%에 이른다. G20 평균이 60%이니 수준이 비슷한 나라 사람들이 돌덩이 두 개를 짊어질 때 우리 국민은 세 개를 어깨에 올려놓고 신음하는 셈이다. 가계 빚의 절반인 650조원은 주택 담보대출이다. 전세 대출도 80조원이 넘는다. 집값이 다른 나라보다 비싸서 그런 게 아니다. 국내 주택 중 공공 임대용 비율이 6%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이 20%대인 유럽 국가들보다 한참 낮다. 정부가 서민 주거 공간을 만드는 데 예산을 좀처럼 쓰지 않은 결과다. 그러니 스스로 빚을 내서 집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이 유독 클 수밖에 없고, 가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노인 빈곤율이 48%로 OECD 1위라는 것도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가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데 돈을 안 쓰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도 OECD에서 가장 길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지만 정부는 수도권 교통 인프라 확충 투자에 인색하다. 나랏돈을 지나치게 아끼다 보니 국민 고통은 커지고, 재정만 건실하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국가 신용 등급이 최고 수준에 올라서는 역설이 그래서 벌어지고 있다.

정부 씀씀이가 짜다는 건 국제 비교를 하면 여실히 드러난다. IMF가 분류한 경제 선진국 39곳 중에서 GDP 대비 정부 지출 비중이 우리나라(21%)보다 낮은 나라는 홍콩·싱가포르·대만 등 소국(小國) 3국이 전부다. G7 선진국은 최저 35%(미국)에서 최고 56%(프랑스)에 이른다. 한마디로 우리 정부는 곳간을 걸어 잠근 채 국민 고통에 귀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규모 세계 11위 국가가 맞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다. 관료들은 그저 자신들이 주요 직책을 맡았을 때 나랏빚이 늘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만 한다. 선진국 관료들은 미련해서 재정 적자를 늘리겠는가.

정부가 재정을 푼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더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여력을 비축해둬야 한다는 주장도 합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긴축재정을 유지해도 가계가 숨 쉴 수 있는 고도성장기가 아니다. 저성장 터널에 갇힌 채 생산 가능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기업 실적이 급감하고, 고용 시장은 초토화됐다. 결국 정부가 재정 여력을 활용해 비상구를 뚫어야 하는 시기다.

세금으로 채워준 나라 곳간이다. 국민을 위해 쓸 궁리 하지 않고 뒷짐만 지고 있는 건 불황에 지친 국민을 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작년에 숨통을 조를 듯한 불경기에도 전년보다 24조원이나 세금을 더 걷었다. 그래 놓고 올해 예산을 고작 4조원만 늘린 건 무슨 염치인가. 정부는 나랏돈을 더 풀어 국민의 무거운 짐을 나눠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