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현 탄핵 정국에서 이렇게 글을 쓴다면 엄청나게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줬을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선출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일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9인 중 3인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3인은 대통령이 지명하므로, 적어도 6인은 정치적으로 임명된다.

탄핵 제도는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마련된 고도의 헌법적 장치인데, 정작 재판을 담당할 재판관들은 대단히 허술하게 정치적으로 임명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으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축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탄핵 제도는 필요한 제도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헌법재판관 임명 제도는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필자의 둔한 머리로는 탄핵 제도에 대해 이런 근본적 질문까지 해낼 수 없다. 대통령 탄핵 반대에 앞장서는 우파 논객들의 논리도 아직 여기에는 못 미치고 있다. 놀랍게도 이 글은 지난 대선 때 출마를 앞두고 문재인씨가 출간한 '운명'(2011년)에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 대해 "비록 기각됐지만 큰일 날 뻔했다"며 소회(所懷)를 적은 것이다. 그러면서 '만약 인용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실제로 헌법재판관 두 명은 당시 인용 의견을 냈다. 탄핵 재판에 대해 꼭 생각해봤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며 이 문제를 제기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선출되지 않은 헌법재판관들의 정치적 판단으로 축출하는 게 정당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탄핵 기각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말하니 세상은 재미있다.

지금 현실에서 탄핵 재판의 독립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재판관 임명 제도 때문만은 아니다. 정작 재판관들로 하여금 '정치적' 판단을 하도록 몰고 가는 것은 거리의 대규모 촛불 집회일지 모른다. 집회 참가자 상당수는 문재인 지지자이다. 헌법재판관 담력이 아무리 센들 '촛불 민심'으로 신성시된 집회 군중을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재판관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촛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최태민 딸 최순실'의 출현으로 온 국민이 경악했지만, 촛불 집회 단 40일 만에 몰아치듯 대통령 탄핵 가결까지 이뤄낸 것도 그만큼 놀라운 일이다. 언론·정치권·검찰도 모두 우르르 촛불에 올라탔다. 우리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전진할 게 틀림없다. 국민은 못난 권력자를 향해 '분노하는 신(神)'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고, 앞으로 어떤 대통령도 박 대통령처럼 국정을 운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만으로 계속 나라를 끌고 갈 수도 없고 끌고 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 비상 역할은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고 헌법재판소에 제출됐을 때까지였다. 그 뒤로는 법과 제도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는 '11차'니 '12차'니 차수를 세며 토요일 저녁마다 대통령 탄핵이 축제인 양 군중이 모여들고 있다. 헌재는 이 촛불들에게서 "기각이면 혁명이 날 수 있다"는 문재인씨 말부터 떠올릴지 모른다.

한때 충격에 빠졌던 박 대통령 지지 세력도 '거리에 몰려나와 세(勢)를 과시하면 얻어낼 수 있다'는 걸 촛불 집회로부터 배우게 됐다. 이들의 '태극기 집회' 규모가 빠르게 커지는 중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태극기 집회 3만7000명 촛불 집회 2만4000명'으로 경찰 집계가 나오자 "전세를 뒤집었다"며 의기양양했다. 반면 촛불 쪽에서는 "경찰이 우리 집회 참가자 수를 줄이는 공작을 자행했다"고 분개했다. 이런 코미디가 있을 수 없다.

애초 대통령의 '하야'보다 '탄핵'이라는 법적 절차를 밟는 게 옳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게 헌정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탄핵 절차가 진행되고 시간이 갈수록 나라는 두 동강 날 판이다. 국민은 둘 중 어느 한쪽 진영에 서도록 점점 더 몰리고 있다. 가령 보수(保守)라면 탄핵에 반대해야 한다는 식이 됐다. 이렇다면 천하의 헌법재판소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탄핵을 기각하면 촛불 군중이 들고일어나고, 인용하면 태극기 군중이 결코 참지 않는다. 재판관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덜 위험한지를 우선 고려할 것이다.

이제 민심의 과도한 분출을 멈출 때가 됐다. 민심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절대선은 아니다. 특히 법적 판단의 기준이 민심이 돼서는 안 된다. 야당 대선 주자들은 촛불 군중에게 “이제는 헌법재판소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며 법 제도에 맡길 것을 설득해야 한다. 박 대통령도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개인 문제로 나라가 분열되는 걸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또 지금의 혼란을 빨리 매듭짓기 위해 헌재의 신속한 진행에 협조하는 게 옳다. 나라와 결혼했다는 대통령의 ‘애국심’은 남다르다는 걸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