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대리인단(변호인단)이 10일 헌법재판소에 세월호 참사 당일인 2014년 4월 16일 대통령의 행적을 담은 답변서를 제출했다. 헌재가 '대통령의 7시간'과 관련해 구체적 소명(疎明)을 요구한 지 19일 만이다. 하지만 헌재는 '내용이 부실하다'며 보완을 요구했고, 국회에선 "그동안 나온 얘기들을 짜깁기한 수준"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대통령 측의 답변서는 A4용지로 16장 분량이었던 데 비해 국회 측 대리인단은 97쪽 분량의 '세월호 7시간에 관한 의견서'를 공개하며 맞섰다.

◇헌재 "박 대통령, 오전 10시 이전 행적 밝혀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3차 공개 변론을 주재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1000일 만에 박 대통령이 밝힌 당일의 행적은 오전 9시 53분부터 시작된다. 국회 측이 집중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오전 10시 이전 행적이 빠져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답변서에서 "오전 10시쯤 국가안보실로부터 세월호 침몰 현황에 대해 첫 서면(書面)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보고를 받은 장소는 관저 집무실이다. 박 대통령 측은 "그날 공식 일정이 없고 신체 컨디션도 좋지 않아 관저에 있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국회 측은 국가안보실이 오전 9시 19분 최초로 사고를 인지했고, 5분 뒤인 9시 24분 '474명 탑승 여객선 침수신고 접수, 확인 중'이라는 문자메시지를 청와대 내에 전파한 점에 주목했다. 당시 각 방송사도 9시 19분부터 속보를 내보냈다. 박 대통령 측 말대로라면 TV뉴스가 나온 지 41분, 안보실이 청와대 내에 상황을 전파한 지 36분 만에 대통령에게 첫 보고가 이뤄진 것이다. 국회 측은 의견서에서 "적어도 9시 30분부터 10시쯤까지 박 대통령이 국가안보실장이나 비서실장 등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 명확하다"고 주장했다. 이진성 재판관도 "답변서를 보면 대통령의 세월호 침몰 최초 인지(認知) 시점이 언제인지 안 나와 있다"며 "TV 등에선 오전 9시 조금 넘어서부터 (사고 소식이) 보도됐는데 10시 이전엔 이를 확인하지 않은 것인지 밝혀달라"고 했다.

◇보고서 받은 시각만 나열

답변서에는 박 대통령이 보고를 받거나 청와대 관계자들과 통화한 시각이 분(分) 단위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진성 재판관은 "답변서의 상당 부분은 박 대통령 측이 주장하는 그날의 보고·지시 내용인데, 헌재가 요구한 것은 박 대통령이 기억을 살려 당일의 행적을 밝히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재판관은 이어 "박 대통령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수차례 통화했다는데 통화 기록도 첨부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탄핵 지연작전에 '헌재의 옐로카드']

일각에선 답변서 제출에 19일이나 걸렸는데도 일부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말도 나왔다. 예컨대 박 대통령 측은 "안봉근·정호성 전 비서관이 관저에서 대면(對面) 보고를 했다"고 했지만, 답변서의 그 대목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그날 관저에 출입한 사람은 가글액을 가져 온 신보라 대위와 미용 담당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적혀 있다. 또 두 비서관의 대면보고 시각은 분 단위로 표기된 다른 보고 시각과 달리 '당일 오전' '점심식사 후 즈음'이라고 애매하게 적혀 있다.

◇박 대통령 측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모두 관저 집무"

박 대통령 측은 답변서에서 '관저 근무'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대통령은 함께 사는 가족이 없어 관저가 제2의 (청와대) 본관"이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령과 질병으로 관저에서 집무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휴일에도 집무실로 출근해 업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며 "아무리 자기변명을 한다고 해도 전직 대통령에 대해 예우도 없이 사실을 왜곡하느냐"고 반박했다.

박 대통령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4년 6월 이라크 무장단체가 벌인 김선일씨 납치 사건 때 관저에 머물며 전화와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씨의 시신이 발견된 시각은 한국 시각으로 밤 10시 20분이어서 단순 비교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박 대통령 측은 또 "박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며 "관계 기관의 잘못된 보고와 언론의 오보(誤報) 때문에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