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시민정치론' 첫 수업 시간. 강의를 맡은 김의영(55) 교수는 신청 학생 60여 명에게 "이 수업은 기말 리포트를 잘 써서 내야 한다. 책으로 나올 만한 수준만 받는다. 자신 없으면 들어오지 마라"고 말했다. 두 번째 수업 시간에 신청 학생 절반이 사라졌다. 김 교수는 남은 35명 전원에게 '선물'을 건넸다. 1만원씩 충전된 교통카드였다. "정치는 청와대와 여의도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이뤄진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네로 뛰어가라. 너희의 눈으로 현장을 봐라."

그날부터 서울시 25개 자치구가 강의실이 됐다. 학생들은 서너 명씩 팀을 꾸렸다. 먼저 25개 구의 시민정치 지표를 분석하는 자료를 만들고, 10개 구를 연구 대상으로 골랐다. 대학원 조교 6명도 가세했다. 이들은 보물찾기에 나서듯 인터뷰를 섭외하고 주민 단체를 찾아갔다. 외국의 사회과학 이론을 현장에서 발로 확인하고, 매주 세미나 형식으로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학기 말엔 팀별로 최대 원고지 250장짜리 리포트를 썼다.

김 교수는 학생들에게 공언한 대로 이 리포트들을 묶어 2015년 12월 '동네 안의 시민정치'라는 책으로 펴냈다.

김의영(가운데)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지난 5일 서울대 사회과학대 건물 앞에서 시민정치론과 글로벌 리더십 수강생들과 포즈를 취했다. 학생들은 작년 7월 경주에서 열린 한국정치학회 하계 학술 회의에서 연구 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누구? ]

관악구의 시민정치 사례는 '작은 도서관, 마을 공동체, 의정 모니터링'으로 분석했다. 작은 도서관들이 사회적자본의 형성에 기여할 거점을 제공하고, 마을 공동체 사업(육아·교육·예술)은 주민 주도로 사업을 꾸려가는 금전적 지원과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게 한다. 의정 모니터링 활동은 구정(區政) 감시를 통해 공익을 증대하는 새로운 공동의 목표를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엔 주부 네트워크가 강점인 구로구의 보육·교육·바른 먹을거리를 들여다본 연구 등도 담겼다. 지역 경제에 근거한 협동조합 사례로는 성동구 성수동(성동제화협회)과 마장동(축산물시장상점가 진흥사업협동조합), 도봉구의 시민햇빛발전 사회적 협동조합을 연구했다. 축제를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시민사회를 연결한 은평구의 사례와 종로구 서촌의 젠트리피케이션(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집값이 오르면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 문제도 짚었다.

학생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24시간 내내 쉬지 않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였다. 1000만 시민 한 명 한 명이 민주주의라는 교향곡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음표였다. 최현주(정치학과 12학번)씨는 "참여예산 제도의 모범 사례로 공부한 브라질 도시 포르투 알레그리의 시스템을 우리 동네에 대입해 보면서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깨달았다"고 했다.

학생들이 현장 수업에 보인 열기는 지난해 1학기 '글로벌 리더십' 과목으로 이어졌다. 학부생 9명, 대학원 조교 8명이 뭉쳤다. 이번에는 서울 5개 자치구에 전국 5개 지자체(광주 광산구·인천 남구·전북 완주군·전북 전주시·충북 옥천군)로 지역을 넓혔다. 연구 결과는 지난해 말 '동네 안의 시민경제'로 묶었다.

올해는 서울대가 있는 관악구를 집중 분석한 '현장 수업 3탄'을 책으로 만들 예정이다. 김 교수는 "학생들을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따뜻한 리더로 키우고 싶다"며 "전국 대학에 수업을 퍼뜨려 교수 20명, 학생 100명이 모인 전체 발표회를 여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