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이 우리의 삶과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에는 무채색의 옷이,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에는 쨍한 원색의 옷이 입고 싶어지는 게 그 예다. 파스텔톤 옷을 입으면 괜히 소녀 같은 기분이 들고, 우울한 날 붉은색 립스틱을 바르면 잠시나마 기분이 전환된다.

우리는 매일 아침 한두 가지의 색을 놓고 고민하지만, 이 세상의 존재하는 색깔의 수는 무한대다. 이 무한대의 색깔 중에서 단 한 가지는 매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미국의 색채 기업 팬톤(Pantone)이 발표하는 '올해의 색'이 그것이다.

각자 도생의 시대, '그린'으로 힐링하라

팬톤은 2017년 유행할 색으로 '그리너리'를 선정했다. 노란색 끼가 있는 초록색인 '그리너리'는 우리말로 황록색에 가깝다. 팬톤 색채연구소의 리트리스 아이즈먼 연구소장은 "자연, 싱그러움, 편안함 등을 상징하는 그리너리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생동감을 주는 색"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2016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희망을 얘기하는 색이라고도 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녹색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의 색'이었다.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녹색은 직물 위에서 쉽게 바래는 색 중 하나였다. 때문에 사라지는 것들, 유년기와 사랑, 돈을 상징했다. 그런데도 로마의 폭군 네로는 녹색을 너무 좋아해 매일 녹색 옷을 입고 에메랄드색의 선글라스를 썼다고 전해진다. 괄시받던 녹색은 산업 발달로 도시가 회색이 되면서 '귀한 색'이 되었다. ▷기사 더보기

서양의 영화나 만화에서 녹색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마녀가 만드는 약의 색깔이 초록색이며, 괴물 헐크의 피부색과 슈렉의 얼굴색도 초록색이다. 뮤지컬 '위키드'에 등장하는 나쁜 마녀 엘파바의 얼굴색도 초록색인 것을 보면, 비현실적이고 나쁜 것을 뜻할 때 녹색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팬톤 '올해의 색'은 어떻게 선정될까?

'팬톤(Pantone)'은 어떤 기업?
1963년, 미국의 로렌스 허버트가 창립한 색채 전문 회사다. 팬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팬톤의 색상 매칭 시스템 'PMS(Pantone matching system)'을 만들면서부터다. 당시에는 색상마다 정확한 명칭이 없었는데, 팬톤은 표준 컬러를 만들어 색상을 필요로 하는 회사들끼리 의사소통을 할 때 혼선을 줄였다. 오늘날에도 디지털, 패션, 인테리어, 페인트 등 색상에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팬톤의 PMS가 사용된다.

2000년부터 매년 '올해의 색' 발표
팬톤은 2000년부터 매년 해가 넘어가기 전 12월에 '올해의 색(color of the year)'을 발표하고 있다. 컬러가 필요한 산업 전반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팬톤 '올해의 색'을 선정하고 발표하는 곳은 팬톤의 색채연구소다. 이들은 매해 세계의 사회·경제적 이슈를 비롯해 엔터테인먼트·문화·SNS 등 다양한 요소를 분석한다. 또한 팬톤 색채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매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지의 문화를 경험하고 색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올해의 색', 팬톤 말고도 있다
'올해의 색' 하면 단연 팬톤이 먼저 떠오르지만, 화장품·페인트·인테리어 업체 등이 개별적으로 올해의 색을 정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친환경페인트 업체인 벤자민무어페인트는 2017년의 색으로 짙은 보라색 계열인 '섀도우'를 선정했다. 또 KCC는 대나무 색상의 '세이지가든'을 골랐다.

최근 몇 년간 '올해의 색'은 붉은색이 대세

2011년의 색 ┃

생동감 있는 붉은 계열의 분홍색. 팬톤은 허니서클이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는 색이라는 점을 들어, 우울함을 날려버리고 긍정적인 기운을 북돋운다고 말했다. 또 허니서클이 남성과 여성, 모든 연령에 두루 어울리는 색상이라고 밝혔다.

2012년의 색 ┃

빨간색과 노란색이 섞인 오렌지빛의 색상. 팬톤은 탠저린 탱고에 대해 "가시성이 높고 열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미지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색"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침체된 경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으로 이 색을 올해의 색으로 뽑았다.

2014년의 색 ┃

푸크시아 꽃 색과 보라, 분홍이 혼합된 따뜻한 느낌의 연보라색. 팬톤은 래디언트 오키드를 선정한 이유로, 현대 사회에 더욱 가치 있게 여겨지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상징하는 색이라고 밝혔다.

2015년의 색 ┃

레드 와인 산지인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있는 작은 마을 마르살라에서 유래한 색. 잘 익은 밤, 숙성된 와인 등을 연상시키는 적갈색이다. 전해의 색인 래디언트 오키드가 기운 넘치는 느낌이었다면, 마르살라는 평온, 안정을 상징한다고 팬톤 측은 말했다.

팬톤이 최초로 두 가지 색상을 올해의 색으로 선정한 해이다. 두 색상 모두 파스텔 톤으로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연분홍 계열의 로즈쿼츠는 홍수정(紅水晶)을 뜻하며, 영어로 고요함이란 뜻의 세레니티는 하늘색 빛깔이다. 팬톤이 상반되는 두 가지 색을 고른 데 대해, 업계에서는 '성 평등을 표현한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올해의 색'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바뀌었다

팬톤은 2017년까지 총 19개의 '올해의 색'을 발표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이를 체감하게 된 건 '탠저린 탱고'가 등장한 2012년 무렵부터다. 이때부터 화장품, 인테리어 업계에서 올해의 색을 입힌 제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소비자들은 이러한 '유행 색'에 반응했다. 패션업계 또한 올해의 색 발표를 기다렸다가 이를 활용한 아이템들을 런웨이에 세우기 시작했다.

'올해의 색'이 트렌드를 이끄는 현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커지는 현상을 보인다. 2014년 '오키드'보다는 2015년의 '마르살라'가, 또 그보다는 작년의 '로즈쿼츠'와 '세레니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다양한 관련 제품이 나왔다.

①에뛰드하우스의 오렌지색 립스틱 광고. ②'로즈쿼츠'와 '세레니티' 색을 쓴 세븐틴의 앨범. ③베네피트의 '오키드' 색상 틴트 광고. ④'세레니티' 색상의 페인트. ⑤스타벅스에서 내놓은 '로즈쿼츠' 색상의 텀블러.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속 천송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방영된 2014년은 형광색이 섞인 분홍색의 전성기였다. 극중에서 여주인공인 천송이(전지현 분)가 형광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나온 뒤, 해당 제품이 외국의 면세점에서 모두 동날 정도로 인기였다. 천송이는 립스틱 외에도 재킷, 코트, 가방 등 형광이 섞인 분홍색이나 보라색 아이템을 자주 착용하고 등장했다. 형광 보라색은 그 해의 색이었던 '오키드'와도 유사했다.

가을이면 늘 와인 색상이 유행하지만, '마르살라'가 올해의 색이었던 2015년에 벽돌색 립스틱은 유난히 열풍이었다. 일반적인 와인색보다 한층 어둡고 짙은 벽돌색은 80~90년대 유행했던 립스틱 색깔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영향으로 메이크업에도 복고 바람이 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다. 일부 화장품 브랜드에서는 벽돌색 립스틱 품절 대란이 일어났으며, 그간 한국시장에서 수요가 없던 벽돌색 계열 립스틱을 추가로 수입하기도 했다.

분홍색 트위드 재킷과 진주목걸이를 한 지드래곤.

몇 년간 붉은색 계열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남성들이 분홍색을 가까이하게 된 것이다. 특히 지난해 '로즈쿼츠'와 '세레니티' 두 가지 색상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이라는 전통적인 색깔의 성(性) 구분이 희미해졌다.

최근 '잘 나가는' 남자들은 모두 분홍을 입었다. 가수 지드래곤은 여성용 분홍색 트위드 재킷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타나 패션의 성적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응답하라 1988'의 배우 이동휘도 분홍색 옷을 자주 입어 '핑크보이'라는 애칭을 얻었으며 혁오밴드의 오혁도 핫핑크색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남자 아이돌그룹 세븐틴은 '로즈쿼츠'와 '세레니티' 색상의 앨범을 지난해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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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톤이 고른 '올해의 색'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유행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팬톤이 선정한 색상에 납득하지 못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2016년 '올해의 색'이었던 마르살라 역시, 예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깃덩어리 같다', '마른 피 색 같다'며 혹평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색깔의 호불호를 떠나, 팬톤 '올해의 색'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색상의 폭을 넓힌 건 사실이다. 립스틱 색으로 쉽사리 선택하기 어려웠던 '오키드'를 대중적인 입술 색으로 만들었으며, 남성들이 연분홍색 옷을 입는 것을 어색하지 않게도 하였고, 집 벽을 핫핑크나 하늘색 페인트로 칠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유행이나 패션에 관심이 없더라도, 각종 기업에서 발표하는 올해의 색을 한번 눈여겨 봐보자. 그해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색깔을 받아들이는 눈도 한층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