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월드타워 내 107층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분은 안내에 따라 1층으로 대피 바랍니다"

4일 오후 3시 9분. 국내 최고층(123층) 건물인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내부에 갑자기 희뿌연 연기가 차올랐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주최로 시민 2936명이 참여한 '롯데월드타워 민관 합동 재난 훈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초고층 빌딩에서 화재가 났을 때를 가정해 긴급 대피 훈련을 한 것이다.

4일 국내 최고층(123층) 건물인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민관 합동 소방재난 대응훈련’ 현장에서 시민들이 안내에 따라 입을 가린 채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시민 2936명이 참여한 이날 훈련은 건물 107층에서 불이 난 상황을 가정하고 안전하게 대피하는 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훈련 시작과 함께 타워 정문에 사이렌을 켠 소방차들이 속속 몰려들었지만, 전망대가 있는 타워 꼭대기 123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전망대에 있던 시민 40여명은 화재 경보에도 아랑곳없이 웃으며 '셀카'를 찍고 있었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던 주부 정모(42)씨는 "사실 재난 훈련보다는 전망대가 공짜고, 기프트카드와 영화표까지 준다고 해서 가족과 나들이 나오는 생각으로 참가했다"며 "여기서 구경하다 천천히 내려갈 생각"이라고 했다. 이날 훈련 참가자들은 대부분 지난달 29일 시작한 온라인 참가 신청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시민들이었다.

555m 높이로 세계에서 6번째 높은 건물인 롯데월드타워는 아직 공식 개장(開場)하지 않은 상태다. 롯데는 지난 12월 7일 서울시에 사용 승인(준공)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번 훈련은 사용 승인에 앞서 피난용 엘리베이터 등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점검하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훈련에 참가한 시민들은 정식 개장 전에 500여m 상공의 전망대를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소풍 온 것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앞으로 롯데월드타워 76~101층에는 6성급 호텔 '시그니엘'이 들어서고, 108~114층에는 VVIP 고객이 한 층 전체를 개인 전용 사무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프리미어 7 프라이빗오피스'가 만들어진다. 회사원 정모(29)씨는 "평생 돈 내고 이용하기 힘든 초호화 호텔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아직 내부 공사가 덜 끝나 너무 아쉬웠다"고 했다.

소방재난본부는 실제와 비슷한 훈련 상황을 만들기 위해 시민 참가자들을 83~123층에 골고루 배정했다. 화재 발생 한 시간 안에 시민을 전부 대피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시민들은 엘리베이터 61대 가운데 이날 훈련 시 피난용으로 지정된 6대와 비상계단을 이용해 대피해야 했다.

하지만 훈련 시작부터 고층부에 있는 비상계단에 병목 현상이 발생해 참가자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층별로 인원을 안배한 주최 측 계획과 달리 초고층 전망을 즐기려는 참가자들이 고층부로 몰렸기 때문이다. 아래쪽을 향해 "빨리 내려가세요"라며 짜증 내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인원이 몰리다 보니 실내 기온도 상승했다. 계단에 갇힌 시민들은 이름표로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히고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친구와 재미있는 추억을 남기려 참가했다는 대학생 윤모(25)씨는 피난 계단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가 39층에서 몰래 빠져나와 일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까지 내려왔다. 윤씨는 "굼벵이처럼 느린 속도로 계단을 통해 한 시간 넘게 내려오니 덥고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예정된 훈련 시간이 지난 오후 4시 10분 주최 측은 "구조 활동이 모두 종료됐다"며 건물 앞 잔디밭에서 마무리 행사를 열었다. 아직 건물 내 피난 계단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훈련 종료' 소식을 듣고 "황당하다"고 했다. 실제로는 참가자의 20% 정도가 건물 안에 남아 있었다. 건물 내 남아 있던 마지막 1명이 나온 것은 훈련 종료 예정 시간을 20분 가깝게 넘긴 오후 4시 26분이었다.

훈련 한 시간 만에 탈출한 박모(33)씨는 땀범벅인 반팔 차림으로 코트와 후드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107층부터 1층까지 걸어 내려왔다. 지인은 피난용 승강기를 타서 1분 만에 1층으로 탈출했는데, 난 인파에 밀려 탑승을 못했고 피난 계단은 계속 정체 상태였다"며 "실제 상황이었다면 정말 큰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