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규

1. 신자유주의 시대의 변종들

그것은 물론,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인간입니다(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중에서).

지구인들의 문제는 돈이었다. 언제부턴가 자본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류의 삶을 이루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타락하기 직전의 자본주의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매력이 지구인들이 지닌 생산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그 이상의 것들을 생산하는 의식 있는 주체다. 그는 인류의 문명을 이루는 생산 능력이 인간의 욕구와 함께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유진 런, 김병익 옮김,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 문학과지성사·1986, 20쪽). 원하는 대상을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로 인해 문명은 발달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발생한다. 생산을 통해 새로운 욕구를 창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던 자본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이되어 지구인들의 신경세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제한된 환경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실현하고 창조하는 자유로운 주체임을 안 자본 이데올로기는 그 점을 이용한다. 자본이란 도구를 인간 삶의 최종 목표가 되도록 만드는 일.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순수한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한 삶을 살도록 만드는 일이다. 인간이 지닌 순수한 욕구를 자본에서 생성되는 욕구로 만들기 위해 자본은 인간을 유혹한다. 주체는 예전보다 다양해진 자아를 실현할 기회가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자본은 그런 인간들에게 재능만큼의 성공이라는 근사한 슬로건을 내세우며 원하는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얼핏 보기엔 자본이 인간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은 자본의 논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재능만큼의 성공을 이루어내기 위해 인간은 어떤 방법도 상관없다는 식의 잔혹함을 드러낸다. 급기야 인간은 그 잔혹함을 자신에게도 허용한다. 성공을 위해 정작 무엇을 실현해야 하고 어떤 욕구를 지니고 있는가마저 모른 채 가혹한 자기개발을 하고 있는 존재. 이것이 성취라는 고도의 심리전으로 인간을 착취하는 21세기 자본의 방식이다. 인간의 속성마저 바꿔버릴 정도로 자본은 개인의 사소한 영역까지 침투한다. 인류의 삶이 지속될수록 자본이 주는 여파는 세대를 막론한 만국 공통의 형상이 되고 있다.

문학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자본의 여파는 문학의 공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는 예술을 자칫 소유나 소장의 대상으로 변질시킬 수 있는 자본의 속성을 걱정했다. 그의 우려대로 예술은 시장 조건의 보급이 활발해진 근대에 이르러 상품화된다. 개인의 자유와 표현이 어느 때보다 실현가능해진 시기에서 그 결과물에 속하는 문학작품이 일종의 이윤 추구 경쟁에 돌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시장 체제로부터 자신이 지닌 생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리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어느덧 2010년에 이른 한국 소설은 속물의 시대를 주된 배경으로 다양한 군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을 구성하는 세대는 1997년에 발생한 금융 사태를 어느 정도 경험한 자들이다. 90년대를 청년 시절로 보낸 자들과 이제는 중년 이후에 접어든 그들의 부모 세대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이미 승부의 결과가 정해져 있는 사투를 경험한 자들이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을 향해 그들의 소설은 이전과는 다른 낯선 방식으로 변이한다. 너구리나 기린과 같은 동물에서부터 모자, 그림자와 같은 사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의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변신담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연대의식마저 찾기 어려운 고립된 주체들로 이루어진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변이의 현상은, 세계 속에 처해 있는 존재의 상태를 대변한다. 이는 아직도 문학이란 대상이 세계를 향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일회성의 소비만큼이나 체제에 최적화된 변종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는 한국소설의 풍경에서 박민규와 황정은이라는 두 명의 변종들이 있다. 특유의 개성으로 2000년 이후의 한국 소설을 풍미하고 있는 자들이다.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속하는 과도기적 상황을 실제 자 신의 청년시절로 보낸 자가 박민규라면, 황정은의 지점은 90년대와 2000년대 사이에 놓여 있다. 그들이 경험한 과도기 시대의 여파가 2000년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 소설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잔인한 생존 경쟁의 논리 속에서 그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변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학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소비되지 않는 불변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작가가 해야 할 일이자 체제 내로 인간을 포섭하려는 세계와 대응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지구라는 행성에서 박민규와 황정은이라는 두 명의 변종들이 펼치는 기묘한 변신담이 시작된다.

2. 자폭할 줄 아는 고급 속물들의 웃픈 풍경들: 박민규의 소설

이데올로기도 없는데

저런 거라도 있으니 말이야

(박민규, 「아스피린」 중에서. 박민규, 「아스피린」,『더블 B』, 창비·2010, 157쪽. 이것을 포함해 이 장에서 다루는 박민규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더블 A』(창비·2010),『카스테라』(문학동네·2003),『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2003),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200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2009)다. 작품을 인용할 때 괄호 안에 제목과 쪽수만 표시하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삼미슈퍼스타즈』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파반느』로 축약한다.)

속물의 시대에 들어서자 지구인들은 변이하기 시작한다. 근대에 들어선 인간들은 “분명 인류와는 전혀 다른 생물”(『핑퐁』, 58쪽)인 개인(個人)이라는 새로운 종(種)이 되어버린다. 어느덧 ‘개인’이란 개체는 지구상의 인류보다 많은 다수를 이루게 된다. 이후 영문도 모른 채 오랜 시간 잔존해 온 그들의 윤리감각은 퇴화한다. 박민규는 그 이유가 그들이 사는 이곳이 “희생하는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을 절대 당해낼 수 없는(『핑퐁』, 255쪽)” 환경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재능만큼의 성공이라는 근대의 경제원리는 인간들에게 “가진 것 없이도, 투자가 없이도 노력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삼미슈퍼스타즈』, 220쪽) 근사한 삶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너무도 공평한 자본의 논리로 인해 인간은 약육 강식이라는 생존경쟁에 들어선다. 문명의 풍요와 혜택은 성공한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다. 재능만큼의 보상을 받을 자격을 지니기 위해 인간은 자아를 버린 채 축적과 소비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비(非)인간이자 코제브가 비유한 동물화된 삶을 사는 고립된 존재들이다(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옮김,『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2007, 150쪽).

자본은 보상이 주는 만족을 이용해 인간을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도록 만든다. 인간이 원하는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시켜주면서 존재를 동물로 길들인다. “이 을 이기기 시작한 시대였고, 좋은 것이어야만 옳은 것이 되는 시절”(『파반느』, 75쪽)을 살고 있는 인간들이다. 자본이 강요하는 체제가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그 질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향해 박민규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이 세상은 뭐든 가질 수 있다, 뭐든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심어줘. 그래야만 끝없이 부러워하고, 끝없이 일하는 99%의 인간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파반느』 173쪽).

박민규는 자본이 인간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대상도 자본주의가 자행하는 부조리한 세계권력이다. 그가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용서할 수 없는 60억의 인간들”(『핑퐁』, 117쪽)의 풍경을 담아내기까지, 한국소설을 지배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도 개인이라는 신종의 탄생과 함께 긴밀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자칭 민주화시대로 불렸던 80년대를 지나며 90년에 이르자, 자본의 논리는 IMF라는 보증금을 걸고 급격히 “프렌차이즈”(『삼미슈퍼스타즈』, 253쪽)화되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자본의 공격에 인간들은 어느 때보다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웰빙욕구에 집중한다.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일수록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간의 사소한 일상의 영역까지 자본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이 꾸준히 논의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다. 그가 단지 자본이 자행하는 부조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을 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폭할 줄 아는 속물의 시선으로 시대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학담론이 피해갈 수 없었던 80년대 민주화시대를 청년시절로 보낸 1968년생 작가다. 이후 90년대의 급격한 금융사태는 작가를 어느 체제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과도기적 감수성으로 만들어놓았다. 체제에 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이란 존재를 향한 작가의 시선의 그의 작품 세계와 함께 2000년대라는 현재의 문학 담론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세계가 깜박할 정도로 자신을 “누락도 아니고 소외도 아닌”(『핑퐁』, 19쪽) 애매한 존재로 생존해왔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적응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철부지들도, 물신풍조를 우려하던 몽상가들도, 때가 되면 자신의 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삼미슈퍼스타즈』, 220쪽)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존재는 참을 수 없이 비참해진다. 작가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인정할 줄 아는 인간들의 비참한 순간을 너무나 귀여운 대상으로 은유화한다.

너구리는 윗사람의 귀여움을 듬뿍 받습니다. 대답을 잘하는 긍정적인 태도와 애교 넘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 역시 연장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점이랍니다. 또 무책임해 보이거나 아첨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끝끝내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당신은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중략)

아무리 쉬쉬해도

언젠가 인간은 세상이 엉망이란 걸 알게 된다.

아무리 쉬쉬해도

결국엔 너구리가 있다는 알게 되듯이.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58~59쪽)

우리가 속물의 세계에 동화된 자들을 “끝끝내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살아야지만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속물이 되는 일도 속물이 안 되려고 발버둥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고 외롭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깨닫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김수영이 말한 ‘자폭을 할 줄 아는 고급 속물들’(김수영, 「이 거룩한 속물들」, 『김수영전집2』, 민음사·2013, 121쪽)이다. 자의식을 지닌 고급 속물들은 고독하다. 속물의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기에는 자의식이라는 윤리기관이 아직 남아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관계되고 싶지 않으면서 다수인 채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핑퐁』, 34쪽) 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때, 존재는 고독해진다. 순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존재의 자아는 변이한다. 작가는 존재가 고독해지는 거룩한 순간을 ‘너구리’나 또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자리에 ‘아스피린’이나 ‘개복치’(「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와 같은 너무나 엉뚱한 대상들로 대신한다. 세계의 부조리를 향한 강력한 풍자임에도 불구하고 박민규가 구현하는 캐릭터가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 대상들이 귀엽기 때문이다. 귀여움이 주는 어감처럼 박민규의 변이체들은 천진난만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텅 빈 새벽 사우나에서 부장의 성추행을 당하고 난 후 혼자 남겨진 ‘나’의 등을 말없이 닦아주며 위로하는 ‘너구리’(「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 알 수 있는 건 이것이다. 그것들이 황당무계한 대상들로 변이될수록 인간이란 존재와 그들이 사는 세계를 향한 사유는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귀여운 변종들로 되살아난 대상의 시선에서 바라본 삶의 풍경은 슬프면서도 우습다. 자아를 가지려 들수록, 삶의 진정성을 찾으려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여전히 세상은 나아지지 않으며 존재는 너무나 보잘것 없다는 사실이다. 존재가 처참해지거나 세계가 처한 상황이 심각해지는 순간, 박민규의 변이체들은 최대한 엉뚱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출몰한다.

작가는 인간을 향한 연민과 세계의 여건을 냉정하게 진단하는 냉소 사이를 적당하게 넘나들 줄 안다. 그 적당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변이체다. 존재가 지닌 페이소스나 자본주의가 자행하는 세계권력과 같은, 자칫 우스워지거나 너무 무거워질 수 있는 소재들을 대상이 지닌 귀여운 속성을 통해 적당히 가볍거나 심각하게 그려낸다. 이 적당한 균형감각을 유지하기까지 작가는 수없이 자폭한다. 자폭할 줄 아는 작가의 눈에 “천국에 들어서기에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에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누런 강 배 한 척」, 65쪽) 보인다. 인생을 알아버렸기에,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은 인간들에게 박민규의 너구리들은 말없이 그들의 등을 토닥여준다. 귀여운 변종의 모습으로 위장한 채 지구에 침투한 박민규의 변종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하나다. 지구상의 속물들에게 자폭을 유도하는 일. 지구인들에게 자폭을 유도하는 박민규의 변종들은 그들을 정복하려는 세계 권력으로부터 그들의 자아를 지켜내고자 한다. 인간들이 세상을 향해 부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 때까지, 박민규의 귀여운 변종들은 계속 변이하고 있다.

3.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친절한 변종들의 역습: 황정은의 소설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에서. 창비·2014, 160쪽. 이것을 포함해 이 장에서 다룰 황정은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일곱시 삼십 이분 코끼리 열차』(문학동네·2008),『파씨의 입문』(창비·2012),『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2013). 작품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제목과 쪽수만 표기한다.)

세계는 더 이상 나빠질 것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시간들로부터 잔존한 인류도 이후의 세대를 이루기 위한 종족을 꾸준히 존속해나가고 있었다. 잔존한 인류의 다음 세대들은 지난 시간에 해당하는 전쟁이나 혁명의 사태를 정통으로 체험해보지 않은 세대들이다. 황정은은 그들이 사는 세계를 두고 “혁명,하고 눈으로 읽은 적은 있어도 자기를 비롯해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직접 들은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곳”(「디디의 우산」, 173쪽)이라고 묘사한다. 언제부턴가 혁명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인류의 세계는 역사 이후의 삶을 닮아 있다. 부조리한 세계의 여건을 향한 갈등이나 부정마저 없어진 무력한 낙원 같은 시대. 자본이 보상해주는 풍요로운 토털 케어(total cara)의 시스템에 최적화된(혹은 보상받을 자격을 지니지 못한)주체이기에 아무도 투쟁하지 않는 시대. 이것이 인간이 소망하는 유토피아의 속성을 이용해 인간을 지배하는 자본의 방식이다. “돈이 중요하도록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드는”(「디디의 우산」, 174쪽) 환경에 최적화된 인간들의 목표는 한결같다. 무조건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인간의 강박은 스스로를 착취한다. 작가는 자신을 향한 가혹한 착취를 자행할 수 밖에 없는 주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 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매우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 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에요. (『百의 그림자』, 17~18쪽)

황정은에게 자본은 존재가 지닌 원죄의식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영원한 채무자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배(腹)를 빌려 나란 존재가 태어나듯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도 어딘가에서 ‘빚’을 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또 다시 빚을 지는 일을 반복한다. 따라서 착취는 살아 있는 동안 나라는 존재의 빚을 갚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먹고 사는 비용”(『百의 그림자』, 93쪽)에 해당하는 채무를 이행하는 일이다. 인간은 자본 앞에서 삶이라는 빚을 진 영원한 죄인이다. 빚을 지는 일이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죽어서도 빚을 남긴다. 그들이 남긴 또 다른 세대가 그 빚을 갚으며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의 연속. 작가는 자신을 비롯해 이 시대를 사는 인간들이 자본주의교라는 벗어날 수 없는 체제를 사는 자들임을 시사한다(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발터 벤야민 선집 5』, 길·2009, 122쪽).

그렇다고 해서 작가는 인간에게 자본이란 거대한 교리를 반드시 신봉하는 일원이 되어야 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인간이 살면서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인가를 역설하는 일. 자폭할 줄 아는 박민규의 고급속물처럼, 황정은이 비유한 존재의 빚도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 삶이라는 빚으로 비유되는 착취의 역설이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윤리 감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빚의 용도는 나와는 무관한 자들의 부당한 빚까지도 생각하는 계기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百의 그림자』, 144쪽)라는 생각들. 너무나 가혹하기에 과연 받아 마땅한 빚인지 의심하게 되는 타인의 삶에 대해서다. 작가는 공허가 불가피한 세계 속에서 자신과 무관한 자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이는 “언제부턴가 내 고통에 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계속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는”(『계속해보겠습니다』, 160쪽)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다. 작가는 타인의 분명한 고통마저도 무관심해진 자들을 향해 친절한 복수를 감행한다.

……곡도를 기르는 사람들에게……좀 더 엄중한 의미와 더불어……

중도 포기, 즉 사육에 실패했을 경우의 부작용이 상당히 심각한 편이므로, 처음부터 신중한 결정을…

…각 개체는 버림받은 즉시 곡도로서의 특징을 잃고 보통의 동물화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 공평무사, 사육자에게도 같은 비중의 ‘분실’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고객님들께서는 확실한 책임의식으로……

……분실의 항목은 개인이나 시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어휘를 잃었다는 보고가 다수 접수된 바 있으며, 자신감이나 미소나 그림자를 잃었다는 내용의 보고 또한 상당량……

회사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미리 공지하였으며 이후 이 같은 결과 발생 시 법적인 책임이 없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곡도와 살고 있다」, 178~179쪽)

인간에게 타인의 고통에 관한 무관심의 대가는 같은 비중의 ‘분실’로 다가온다.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예측할 수 없는 그만큼의 항목이 발생하는 분실은 존재가 감당해야 할 업보다. 이는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계속해보겠습니다』, 160쪽)는 공평무사한 책임의식에서 비롯한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인간은 괴물이 된다. 작가는 착취를 통해 얻는 이익만큼이나 발생하는 존재의 상실이 있음을 곡도를 통해 역설한다. 자신을 사육할 자들에게 책임의식을 요구하는 도도한 변종을 통해, 속물의 세계를 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경고한다. 자폭할 줄 아는 속물들의 서글픈 삶을 향한 위안과 풍자의 대상이었던 박민규의 너구리들은 황정은에 이르러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들과 맞서는 도도한 곡도들로 진화한다. 현실이 주는 가혹함에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마저 상실한 인간들을 향해, 황정은의 곡도들은 경고한다. 아무도 고통을 바라지는 않지만 무의미한 고통은 있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고해(苦海)라는 빚을 진 인간의 삶이 세계로부터 무의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물화된 변종들을 투입한다. 뜬금없이 아버지가 종종 ‘모자’로 변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가족들은 문득 이렇게 생각해본다. 왜 하필 모자로 변해야 하는 이유보다는 그가 모자로 변하는 순간의 정황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자 가장이라는 빚을 지닌 무능력한 아버지의 쓸쓸한 삶이 그려진다.(『모자』) 모자와 같은 평범한 사물로 인해 인간의 비극은 분명해진다. 나를 비롯한 타인이 겪고 있는 저 분명한 고통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잊는 순간, 인간은 괴물이 된다. 작가는 이곳을 사는 자들이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로 최후를 마감할 수 있도록 지켜낸다. 이것이 역사 이후의 삶을 사는 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존재의 품격이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하다.”(『계속해보겠습니다』, 13쪽) 그러므로 절망은 인간의 삶을 연명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위안이 될 수 있다. 절망이야말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인간의 분명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 달콤한 고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이제는 상당히 쇠약해졌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견고해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대니 드 비토」, 50쪽)는 인간들의 모습이 보인다. 존재가 견고한 인간으로 최후를 마감할 때까지 황정은의 곡도들은 놀라운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4. 날마다 리부트(reboot)되는 주체, 이 시대 뷰티풀 엑스의 탄생기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자본은 대부분의 인간들을 괴물로 만든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그 이상의 것들을 생산하는 주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푸코가 말한 호노 에코노미쿠스로 진화한다. 자본의 이익과 흐름에 부응하는 경제적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실존의 위험을 초래한다.  생존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성을 분실한 주체는 괴물이 된다. 그리고 그 분실만큼 현재의 한국소설은 미처 해소되지 않는 여백이 발생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역사 이후의 세계를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무기력이 그것이다. 이 여백으로 인해 사회를 향해 자유로운 위반과 전복의 상상력을 구현해야 할 한국 소설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금융위기라는 갑작스런 자본의 공격에 대응할 개인의 여건을 미처 염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기 이전에 속물의 세계에 최적화될 수밖에 없는 슬픈 괴물들이 자라나 지금의 여백을 만든다. 그들은 괴물이 되기에는 자폭을 할 줄 아는 일말의 자의식이 남아 있기에 슬픈 존재다. 박민규와 황정은은 이 시대가 낳은 슬픈 괴물들이다. 한쪽은 자폭하는 속물의 시선과 다른 한쪽은 인간성을 분실한 만큼 되돌아오는 업보의 방식으로 희미해진 존재의 윤리감각을 되살리고자 한다.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는 세계와의 사투에서 절대 착취될 수 없는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자유를 거부한다.

그 가 뭔데?

(중략)

를 견지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너도 알다시피 모든 선수들의 가슴 속엔 저마다 빛나는 자존심이란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또 놈들은 누구나 칠 수 있을 것 같은 공을 끊임없이 던져주곤 해. 또 일부러 바로 코앞에 공을 던져 선수들을 유혹하기도 하지. 물론 그건 노동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야. 어이, 자네 새 차를 뽑았다며? 여어, 진급을 축하하네!에서 사소하게는 자네 요즘 비싼 담배로 바꿨군, 이나 미스 정 많이 예뻐졌네, 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유혹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 프로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놈들이 바라는 이 세계의 여건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 252~253쪽)

작가는 성공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한 혜택으로 인간을 지배하려는 세계의 여건에 대응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나를 거부하는 일이다. 체제가 요구하는 성공을 이룬 자들이 누리는 혜택은 인간이 끝없이 부러워하는 들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은 자본에 의해 언제든지 소비 가능한 레디메이드 옵션들이다. 반면 애초부터 소비가 불가능한 은 환영받지 못한다. 이 을 이기기 시작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 위협하는 유일한 대상이 임을 안 자본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을 욕망하도록 유혹한다. 그 방법으로 자본은 “누구나 칠 수 있을 것 같은 공을 끊임없이 던져주는” 친절한 자유의 속성을 이용한다. 세계는 인간에게 을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실현해야 할지 생각할 수 없도록 강요받는다.

이미 너무 많은 자유를 강요하는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을 향해 박민규는 다짐한다. 그들이 선사하는 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작가의 말」, 『파반느』, 417쪽)만들겠다고. 들이 시시해지려면 들을 향해 부러워하지 않는 초연함이 필요하다. 그래야지만이 인간의 부러움과 부끄러움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동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 그 방법으로 박민규는 무위의 자유를 실천한다. 일부러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을 잡지 않는” 굴욕을 견디며 작가가 발견한 무위의 자유란, 옳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다. 만큼이나 도 누가 뭐래도 이다. 옳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일이 당연한 세계를 꿈꾸는 일. 작가는 무수한 굴욕을 견디는 네오아담을 통해 이 당연한 세계를 소망한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엔 뭘 할까 뭐라고 말할까 고마워요 정도면 친절할까. 친절하게 충돌해주어서 고마워요.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도 닿지 못하고 떨어져 내린다.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다가도 이렇게 떨어져서야 가망이 없다는 낙담 뿐이다.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황정은, 「낙하하다」, 77~78쪽).

황정은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자들을 향해 “나와 충돌해”달라고 외친다. 나라는 존재의 각성을 위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가망 없는 세계의 무력감을 닮아가는 내가 되느니 차라리 덧없이 사라지는 편이 낫다. 그러나 나조차도 어쩔 도리 없이 세계로부터 포섭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폭하기란 쉽지 않다. 무력한 나의 삶을 구원해 줄 타인이라는 강력한 기폭제가 있어야 한다. 타인이 처한 부당한 삶에 골몰했던 것처럼 황정은은 그들을 향해 친절한 기폭제가 되어 준다. 서로의 삶을 파괴하러 온 구원자들이 되는 일. 모든 인간은 구원자다. 다만 나라는 존재가 타인을 향해 충돌받(고 있거나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혁명의 가능성이 희박한 세계라고 해서 가망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야 하는 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세계를 “아무래도 좋을 일(것)”(『계속해보겠습니다』, 60쪽)들로 채우는 일. 작가는 애초부터 고통스럽기에 특별히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좋은 것들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들에게 아무래도 좋을 일들이 다가올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일. 어느덧 자신에게 ‘가망 없는 감정’을 가하는 세계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라는 시시한 인간으로 발생하고 부단히 내가 되고자 노력하며 사라질 뿐”(「파씨의 입문」, 209쪽 변용)인 황정은이라는 네오 이브가 탄생한다. 수많은 자폭과 충돌을 통해 이 시대의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로 탄생한 그들은 세계가 결코 착취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해 상상한다. 세계의 공격에 초연해지는 방법을 알게 된 그들은 또 한 번의 기적을 향해 나아간다.

소라로 인생을 끝낼 작정이야.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45쪽)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인간들과 더불어…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박민규, 『파반느』, 225쪽)

인간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나’라는 존재로 멸종한다. 나라는 존재로 최후를 마감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를 알게 되는 일. 그것은 기적이다. 박민규와 황정은이 지구인들에게 바라는 건 이런 것이다. 비관주의로 무장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세상에서 좋을 일들이 도래할 미래를 꿈꾸는 일. 그것은 앞으로 내게 다가올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이다. 그들이야말로 보잘 것 없는 모습을 한 채 변이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들이다. 자폭과 충돌을 통해 그들의 변이가 이루어지는 순간 이 시대의 뷰티풀 엑스가 탄생한다. 착취에 최적화된 다양한 혜택과 가망 없는 감정들로 공격하는 세계를 향해 아름다운 변종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다양한 버전으로 대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아프지 않을”(『파반느』, 378쪽) 수 있다는 인간의 용기가 기적을 이루어낸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한 번 삶을 살아내는 인간들이야말로 날마다 리부트(reboot)되는 주체이자 이 시대의 아름다운 변종들이다. 자신의 힘을 믿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진화가 시작된다. 지구인들의 몸 속에 숨겨진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깨우는 일. 그 은밀하고 위대한 작업을 박민규와 황정은이라는 변종들은 지치지 않고 이어 나간다.

5. 아름답게 멸종하기 위해 태어난 이 시대의 변종들을 위해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과제는

국가적 제도로부터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결부된

개별화 방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미셸 푸코, 「국가와 권력」, 464쪽)

이것은 어느 지구라는 별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죽어서 빚을 남기고 소년을 빚을 갚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百의 그림자』, 93쪽) 이 ‘빚’의 자리에 ‘누군가의 배를 빌려서 태어난 인간의 삶’이라는 공식을 대입해본다. 아버지가 죽어서 소년이라는 아이의 삶을 남기고 소년은 아버지가 남긴 자신의 불가피한 삶을 살아내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 나라는 인간이 아이를 낳고 아이보다 먼저 죽는 일. 그 아이가 나보다 오래 살아서 또 다른 아이를 낳고, 또 다른 아이보다 먼저 죽는 지복(至福)을 바라는 일. 진부한 개연의 논리가 유일하게 허용되는 공간. 그곳이 지구다. 그곳에서 결코 착취할 수 없는 인간의 생산 능력이 기적이라는 필연을 이루어낸다.

필멸(必滅)의 삶을 사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건 이기적인 유전자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움 없이 기다릴 수 있는 것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덧없는 세계를 향해 아무래도 좋을 일들로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 지닌 이기적 유전자 덕분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먼저 죽은 ‘유라’라는 귀신이 그랬다. 죽어서도 남아 있는 나의 쓸쓸함이 죽음을 앞둔 당신에게도 닥칠 것을 안 유라는 간절히 바란다. 내가 겪는 쓸쓸함을 당신만은 겪지 않기를. 반드시 나와 함께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가 “죽고 난 다음엔 무엇으로도 남지 않기를”.(「대니 드 비토」, 58쪽) 가장 이타적인 것이 가장 이기적인 것이다.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들도 느껴 봐. 그러니까 한 번 당해봐.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아 봐, 가 아니라 적어도 나와 관련한 자들만큼은 내가 알고 있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바라는 일. 나아가 나와 전혀 무관한 자들의 미래가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일. 인간의 몸 속에 숨겨진 이기적인 유전자는 존재의 희미해진 윤리감각이다. 인간이 지닌 은밀하고 위대한 이기적 유전자가 그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 존재는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한다.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구원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일. 그 방법으로 자신을 온전히 파괴할 권리를 요구하는 존재의 용기가 숭고의 미학을 이루게 된다. 박민규와 황정은이 구현하는 변종들이 아름다운 건 그 이유에서다. 그들은 수많은 자폭과 충돌, 파괴를 통해 아름다운 최후의 지점에 다다른 존재의 풍경을 환기한다. 변이된 21세기 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은 푸코가 말한 이중의 억압 상태에 놓여 있다(미셸 푸코, 위의 책, 464쪽).

개인이라는 자유로운 개별자들로 존재하는 동시에, 계급 없는 근대적 권력 구조에 자발적인 착취로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이 해방되려면 자본이 강요하는 자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의 자유가 아닌 인간의 자유를 실천하는 일. 승산 없는 사투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많은 기적의 버전으로 대응하는 일이다.

보잘 것 없는 절대 다수의 인간이 자신과 무관한 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이와 비슷한 방식을 문학이란 공간에 적용해 본다. 문학이 아름다운 최후의 지점에 다다른 존재의 풍경을 담아내는 순간이 있다. 두 상황은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한 존재의 윤리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자폭을 할 줄 아는 슬픈 괴물들이라면, 일말의 자의식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인간이라면 이 질문에서 불편해져야 한다. 박민규와 황정은은 슬픈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들의 삶을 파괴하러 온 친절한 구원자다. 그들은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는 세계를 살고 있는 자들에게, 괴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불편한 사유를 제시한다. 내 안에 숨겨진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가 깨어나는 순간, 인간은 나라는 존재로 아름답게 멸종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향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의 숭고한 경험이다. 존재가 보잘 것 없는 자들일수록 숭고의 경험은 더욱 빛을 발한다. 가혹한 생존 경쟁의 논리가 인습화되어 있는 시대에서 버림받은 존재로부터 숭고한 순간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 작가의 의무이자 문학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용기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카스테라」,34쪽) 지점에 이른다. 자신을 가혹하게 내몰던 세계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구원이자 기적이다. 그 기적이 이루어지기까지 작가는 이곳을 향한 “실패와 패배의 기록”(『야만적인 앨리스씨』, 161쪽)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를 향해 외치는 인간들의 구호다. 혁명이 희박한 세계이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들은 날마다 리부트된다. 그들이 바로 실존이란 항체를 지니고 낯설게 되살아나는 이 시대의 아름다운 변종들이다. 신자유주의시대라는 달콤한 지옥은 박민규와 황정은이라는 아름다운 변종들을 만들어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아름다운 변종들로 진화하기까지 그들의 명랑한 변이는 계속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