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그분은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부모 자식이 있나, 뭘 하려고 돈을 착복하겠나” 하는 대구 서문시장 상인의 말처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연민(憐憫)은 눈앞에 드러난 국정 농단조차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박사모 등의 맞불 집회에서는 “좌편향된 언론과 촛불 세력이 결탁해 죄 없는 박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문사에도 “과연 보수 신문이 맞느냐”며 논조에 대한 항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박 대통령 지지자의 상실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이런 압박은 신문 종사자를 난감하게 만든다. 사석에서는 "보수 언론의 배신(背信)으로 이번 사태가 확대됐다"는 말까지 들었다. 취재 보도 과정에서 오류와 치우침, 판단 착오를 범하고 어떤 사안에서는 멈춰야 할 선을 넘은 때도 있었지만, 사상 초유(初有)의 국정 농단에 대한 보도와 논평에 그렇게 치명적 흠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보수(保守)'란 박 대통령을 무조건 밀어주는 것처럼 되어왔다. '보수 신문'이라면 보수 정권의 대통령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구체적 사안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대통령 편이냐 아니냐'를 먼저 묻는 식이다. 이는 최순실 일당의 국정 농단이 드러나기 전부터 그래 왔다.

과거에 노무현 대통령 주변의 극단적 좌파가 설쳐댈 때 필자는 그 광기(狂氣)와 독선에 크게 낙담했던 적이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좌파보다 극단적 우파의 거친 공세에 훨씬 더 많이 시달렸다. 대통령에게는 이들이 호위 무사처럼 든든했을 것이다. 2년 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터졌을 때도 이들은 "한낱 '지라시'로 밝혀졌는데도 선동 언론이 대통령을 계속 흔들고 있다"고 옹호했다.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 퇴진 주장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악의적으로 방해하는 것으로 공격했다. 이런 세력을 업고 대통령은 3인방 손을 들어줬다. 돌아보면 그때가 대통령에게 최순실 비선(�線)을 정리할 기회였다.

맹목적 지지자들은 대통령에게 분별력을 헷갈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무엇을 해도 옳다고 믿게 만든 것이 현재의 파국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됐는지 모른다. 지금도 이들은 대통령의 실체가 아닌 환영(幻影)을 여전히 보고 있다. 대통령이 마치 억울한 피해자인 양 흐름을 바꾸려 하고 있다. 거리의 동조자가 점점 많아졌다. 지금 상황에서 대통령 비판은 내키지 않으나 사실관계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반에 '비정상의 정상화'를 내걸었다. 정작 본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비서실장이 청와대 경내에서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정권이었다.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전달하기 위해 본관과 관저 양쪽으로 직원을 보내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 직원은 헐레벌떡 뛰어갔을까 자전거를 타고 갔을까. 정상적인 나라 구실을 갖추고 있다면 이런 코미디가 없다.

장관과 참모진의 '대면(對面) 보고'가 큰 이슈가 된 것도 역대 정권 중에서 이 정권이 유일하다. 신년 회견 석상에서 "대면 보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한 대통령도 박 대통령밖에 없었다. 장관은 안 만났지만 대기업 회장은 독대하고, 최순실씨를 만나고 성형외과 의사 부부는 만났다. 장관은 국정 파트너가 아니라, 정부 직제상 채워놓을 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구설에 오른 장관들이 아니면 그런 장관이 있는 줄 국민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 장관을 뽑느라 인사 때마다 대판 난리를 치고, 이를 밀어붙이려는 고집과 불통(不通) 논란이 정권 내내 끊이질 않게 만들었다.

이런 박 대통령을 보수의 '심벌'로 혼동하고, 그의 탄핵을 마치 보수의 패배와 연결하는 게 과연 옳은가. 이제 대통령 지지 세력은 의리와 배신이라는 방패를 들고 있다. '박근혜를 지키는 것이 보수를 지키는 것'이라고 진영(陣營) 논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성과 합리적 태도는 추방되고, 민주주의 원칙과 보수의 가치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발붙일 데가 없다. 명색이 보수의 자존심까지 내팽개치려고 한다.

이에 힘입어 박 대통령 측은 '헌재 답변서'에서 모든 의혹과 의문을 반박하고 있다. 국민에게 입힌 마음의 상처도 잊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신을 추락시킨 것도 잊고서, 무죄 추정과 연좌제 금지 원칙이니 최순실 국정 개입 비율은 1%이고 '키친 캐비닛'과 같은 것이라며 자신의 억울함만 호소했다. 한때 반대 진영에서도 박 대통령의 애국심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대통령이 저잣거리 필부처럼 형량을 다투겠다는 식이다.

박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마지막 품위를 지키는 게 옳다. 지지 세력의 자제를 당부하고 홀로 떠안고 가야 한다. 박 대통령을 찍었던 국민들은 그에게 지불한 값비싼 수업료를 아무 의미 없이 날려서도 안 된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