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규보(李奎報)가 술통에 새긴 '준명(樽銘)'은 이렇다. "너는 쌓아둔 것을 옮겨, 사람의 배 속에 넣는다. 너는 가득 차면 능히 덜어내므로 넘치는 법이 없다. 사람은 가득 차도 덜어내지 않으니 쉬 엎어지고 만다(移爾所蓄, 納人之腹. 汝盈而能損故不溢, 人滿而不省故易

)."

글 속의 불생(不省)이란 말 때문에 반성을 거부하는 태도의 만연을 따끔하게 찌른 김수영의 시 '절망'이 생각났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풍경과 곰팡과 여름과 속도, 졸렬과 수치가 절대로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듯이 절망도 끝내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시의 골자다. 풍경과 곰팡, 여름과 속도는 병렬되기 힘든 어휘의 조합이다. 여기에 졸렬과 수치가 얹혀 의미가 더 꼬였다. 풍경이 어떻게 풍경을 반성하나? 이 말은 어불성설이다.

풍경과 여름은 가치중립적이고, 곰팡과 속도는 때에 따라 부정적 맥락에 놓일 수 있다. 졸렬과 수치는 명백히 부정적이다. 풍경이나 여름은 그냥 존재태이다. 곰팡이와 속도도 그렇다. 곰팡이가 피고 싶어서 피나? 하강하는 사물에 속도가 붙는데 무슨 도덕적 이유가 있겠는가? 이런 것들은 당연히 스스로를 반성할 필요가 없다. 반면 졸렬과 수치는 반성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들이 가치중립적 존재의 흉내를 내며 반성할 줄 모른다. 여름은 여름을 반성할 필요가 없지만, 졸렬과 수치가 덩달아 그래서는 안 된다. 딴 데서 불어오는 바람과,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다가올 구원을 기다리는 것인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절망마저도 여름이나 풍경 행세를 하며 끝까지 반성을 거부한다. 그 절망적인 태도가 우리를 절망시킨다. 하지만 딴 데서 불어올 바람은 역풍이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다가올 것은 구원이 아닌 파멸일 뿐이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