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수사 당국이 지난해 11월 파리 연쇄 테러 총책 압델하미드 아바우드를 사살할 수 있었던 건 테러범이 버린 휴대전화 덕분이었다. 테러 현장 근처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휴대전화에 '우리는 시작한다'는 문자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테러 당일 작전 개시를 누군가에게 보고한 것이다. 메시지는 프랑스 한 호텔방에 있던 전화기에서 수신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때만 해도 시리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아바우드 은신처가 이를 통해 포착됐다.

▶테러범 추적은 물론 일반 수사에서도 휴대전화는 1차 확보 대상이다. 개인 신상과 행적, 메시지 정보가 다 담겨 있어 수사기관이 강제 수사로 전환할 때 가장 먼저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게 휴대전화다. 사용자가 삭제해도 통화 내용은 물론 문자메시지, 녹음 파일은 대부분 복원된다. 감청이 사라진 후 이만한 증거 확보 수단이 없다. 그러니 잡범은 대개 흔적을 안 남기려고 대포폰을 쓰거나 그것도 불안하면 아예 전화기를 강물 같은 데 버린다고 한다. 범인 처지에선 가장 확실한 증거 인멸이다.

▶이젠 정부 인사라고 다를 게 없다. 최순실 사건을 통해 최씨를 비롯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이 대포폰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안 전 수석은 대포폰으로 사건 관련자를 회유하려 하기도 했다. 현 정부는 2년 전 대포폰·대포차·대포통장 등 '대포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했다.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정작 비선 실세와 왕수석, 문고리 권력은 다 대포폰을 쓴 것이다.

▶수사 전문가인 검사들이 수사 대상이 되면 어떨까. 얼마 전 고교 동창 사업가인 친구에게 뇌물 받은 혐의로 기소된 김형준 부장검사가 답을 보여줬다. 사건이 불거지자 그는 친구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 '메모한 것 지우고 휴대전화 바꾸라'고 했다. 그리고 검찰에는 자신의 업무용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사실은 아마 버렸을 것이다. 검찰은 끝내 이 전화를 찾지 못했다.

▶검찰이 엊그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휴대전화를 압수했는데 통화 내용과 문자메시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상 '깡통 전화기'였던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수사 전문가인 그가 휴대전화를 그대로 뒀을 리 없다. 자기 증거를 자기가 없애는 건 처벌도 못 한다. 한때 사정 기관을 총괄했던 사람도 떳떳지 못한 흔적을 지우려는 데선 일반 잡범이나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그만 탓할 수도 없다. 검찰은 우 전 수석이 고발된 지 114일 만에 그의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이렇게 충분히 증거 인멸 시간을 줘놓고 누굴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