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 과학전문기자

낯선 도시에서 맞은 첫 대학 생활, 몸에 한기(寒氣)가 들면 영혼의 음식이 그리웠다. 고향 집의 된장찌개만 먹으면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특별한 날에만 먹던 뻘건 소고깃국도 감기약보다 백배 천배 효과가 클 것 같았다. 스무 살 청춘도 그랬는데 하물며 오랜 투병 생활을 하는 환자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병원에서는 소금도 설탕도 삼가야 한다며 밍밍한 병원식만 내민다.

환자도 건강염려 없이 어머니의 달고 짠 손맛을 맘껏 즐길 길이 열리고 있다. 가상현실에서 음식 맛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이를테면 고혈압 환자도 컴퓨터로 만든 가상 식당에서 소금이 듬뿍 들어간 음식에 손을 뻗으면 먹지 않아도 그 맛이 그대로 뇌에 전달되는 식이다.

싱가포르 국립대의 니메샤 라나싱헤 박사는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컴퓨터학회에서 혀에 온도 자극을 줘 음식 맛을 느끼게 한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전류에 따라 온도가 변하는 열전(熱電) 소자를 실험 참가자의 혀에 갖다 댔다. 온도를 섭씨 40도까지 올리자 단맛이 난다고들 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온도가 35도가 되면 매운맛이 난다고 답했다. 온도를 18도로 내리자 이번에는 박하 맛을 느꼈다고 했다.

라나싱헤 박사는 2014년 아랍에미리트(UAE)의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에서 혀에 전기 자극을 줘 맛을 느끼게 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혀의 미각(味覺) 수용체 단백질에 맛 분자가 결합하면 세포에 흐르는 전류가 달라지면서 뇌로 신호가 전달된다. 그렇다면 맛 분자가 결합할 때 나오는 전기 신호를 인위적으로 만들면 음식을 먹지 않고도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연구진은 둥근 막대 모양의 전극을 혀에 대고 전류를 흘려 짠맛과 신맛. 쓴맛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장치를 '디지털 막대사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전기 신호로는 단맛이 좀처럼 재현되지 않았다. 이번에 그 답을 온도에서 찾은 것이다. 원래 단맛 수용체 단백질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같은 음식이라도 온도가 높으면 단맛을 더 강하게 느낀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가상현실(VR)이란 무엇인가]

연구진은 열전 소자를 컵이나 유리잔에 붙이면 설탕 소비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건강을 위해 설탕을 줄인 음료수도 열전 소자 온도를 높이면 여전히 달게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앞서 개발한 디지털 막대사탕을 숟가락 형태로 개발해 고령 환자의 염분 섭취량을 줄이는 임상시험도 하겠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숟가락이 음식에 없는 가상의 짠맛을 제공한다고 해서 '전자 양념'이라 불렀다.

맛은 혀로만 느끼는 게 아니다. 씹는 맛도 중요하다. 일본 도쿄대 오가와 다케후미 교수 연구진은 이번 학회에서 얼굴에 전극을 붙이고 미세한 전류를 흘려 씹는 맛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음식을 씹는 데 관여하는 턱 근육 위에 전극을 붙였다. 딱딱한 음식을 씹으면 근육이 강하게 작용한다. 주파수를 높여 같은 시간에 전류가 더 많이 진동하게 하자 실험 참가자들은 딱딱한 음식을 씹는 느낌이 난다고 답했다. 전류의 파장을 길게 하면 말랑말랑한 젤리 맛이 난다고 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씹는 맛도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죽같이 부드러운 음식만 먹어야 하는 환자도 얼굴에 전극만 붙이면 쿠키와 젤리를 씹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딱딱한 쿠키를 먹을 때 얼굴에 붙인 전극으로 파장이 긴 전류를 흘리면 젤리를 먹는 느낌이 났다고 한다.

연구진은 얼굴의 다른 근육도 자극해 씹는 맛을 더 풍부하게 재현하겠다고 밝혔다. 또 쿠키 씹는 맛을 줄 때는 바삭거리는 소리를 함께 들려주는 식으로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향기도 한몫할 수 있다. 게맛살에는 게살이 없다. 게 껍데기 향기를 넣은 덕분에 게 맛이 난다. 캐나다 몰레큘러-R 플레이버사(社)가 개발한 '아로마포크(Aromafork)'는 손잡이에서 향기가 나와 먹고 있는 음식에 없는 맛까지 제공한다.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박태현 교수는 사람의 혀와 코보다 더 민감한 전자 혀, 전자 코를 만들면 어머니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동영상으로 남기듯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된장찌개 맛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고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 냄새에 이끌려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어머니 손맛이 그리울 때면 가상현실로 들어가 추억 속의 된장찌개를 맛보며 시간여행을 할 날이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