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시작됐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본관 점거 농성이 86일 만인 지난달 21일 공식 해제됐다. 앞서 최경희 전 총장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20·체육과학부)씨에 대한 입시·학사 관리 등 특혜 의혹에 휩싸이면서 지난달 19일 사퇴했다. 학생들은 이날을 '이복절(이화여대 광복절)'이라고 부르며 환호했다.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유라씨 특혜 의혹을 주도적으로 제기한 '이화여대 시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른바 '이대 사태'는 지난 7월 28일 교육부가 30억원을 지원하는 '미래라이프 단과대학' 사업을 학교 측에서 졸속 강행한 것에 항의해 학생들이 본관 점거 농성을 시작하며 시작됐다. 7월 30일 본관에 갇힌 교직원 5명을 빼내기 위해 경찰 1600명이 투입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학교 졸업생 A씨는 "후배들이 농성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학교에 경찰까지 투입됐다는 소리에 분노했다"며 "졸업한 동기들도 시위에 참가하거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8월 3일 미래라이프 사업은 무산됐지만 학생들은 "최경희 총장이 사퇴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한다"는 입장을 냈다.

86일간 이어졌던 이화여대 사태는 최경희 전 총장이 사퇴하면서 일단락됐다. ‘이화를 사랑하는 재학생 및 졸업생 일동’은 “우리가 요구한 사항들이 빠짐없이 이행되고 있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했다.

총학 주도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시위

시위 초기, 학내 문제에 머물렀던 이대 시위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신선한 시위 방식 때문이었다. 경찰 앞에 대치한 학생들은 아이돌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이 모습이 담긴 동영상은 SNS 등을 통해 퍼지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농성 학생들은 서로를 '벗'이라고 불렀다. 총학생회 소속이 아닌,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이화이언'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본관을 지켰다. 서로의 이름·학번·전공을 굳이 묻지 않는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시위에 참가해 철저히 익명성을 지켰다.

학생들은 매일 본관에서 열리는 '만민공동회'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본관 1층에 모여 앉아 그날의 안건을 토론하고 표결에 부쳤다. 발언 시간이나 회의 시간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여기서 결정된 의견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따랐고, 회의 내용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됐다.

시위가 전국적 주목을 받으면서 나름의 체계도 갖추기 시작했다. 기자들 문의에 답하는 '언론팀', 시위 질서를 유지하는 '현장 스태프', 본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물품팀', 경찰 시위 진압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긴 학생들을 돕는 '심리상담팀' 등이 만들어졌다. 봉사를 자원한 학생들이 돌아가며 업무를 맡았다. 언론계·법조계에 있는 졸업생들이 재능 기부를 해오기도 했다.

딱히 지도부가 없다 보니 시위 일정 공지나 성명서 발표, 취재 협조 등의 의사결정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봉사팀이 초안을 올리면 댓글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기자의 질의를 받으면 답변하는 데 반나절 이상이 걸렸다. 의견이 분분해 어느 한 쪽으로 입장을 밝힐 수 없는 경우에도 하나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본관에서 밤을 새우거나 중간고사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수면실과 공부방이 마련됐다. 생활용품·간식·의약품 등을 공유하는 '나눔존'이 생겼고 후배들을 도우러 온 졸업생들이 진로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중간고사 기간이 되자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은 교대로 농성장을 지켰다. "시위할 시간에 공부나 해라"는 비아냥에 책을 편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공부 시위'로 대응한 것이다.

이대 학생들은 '외부 세력은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원칙에 따라 서로의 복장까지 통제했다. 세월호 리본, 위안부 팔찌 등의 착용 여부를 두고 설전이 오갔다. '자칫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의견과 '개인의 표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라는 의견이 갈렸으나 결국 착용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시위에 특정 페미니즘 커뮤니티 티셔츠를 입고 온 학생이 다른 학생들의 지적을 받고 재킷을 걸쳐 입기도 했다.

정유라 특혜 의혹으로 급물살

시위가 장기화하자 "학생들이 출구 전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에 몰렸던 자원봉사팀 인력도 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 중순 정유라씨에 대한 대학 측의 특혜 의혹이 불거지면서 학생들 분노에 다시 한번 불이 지펴졌다. 정씨와 같은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이 "(다른 학생들은) 노력 끝에 얻은 학점을 정유라씨는 어떻게 수업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최소 B 이상 챙겨갈 수 있느냐"는 대자보를 붙였다. 언론에는 이대 학생들의 제보가 잇따랐다. 학생들은 교육부에 정씨 특혜와 관련해 감사를 요청하는 민원을 연달아 넣었다.

지난달 19일 이화여대 교수 200여 명은 본관 앞에서 "(정유라 특혜 의혹에) 최 총장이 연관됐다면 이는 이화정신에 위배되는 정도가 아니라 범죄적 행위"라는 성명을 내 학생들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학생들은 '스승의 은혜'를 부르며 교수들과 함께 교내에서 행진했다. 2012년 이대를 졸업한 B씨는 "학생들이 끈질기게 농성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정유라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최 전 총장의 사퇴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대 시위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위 방식으로 일반 학생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며 "외부 세력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학내 민주주의'라는 의제를 밀도 있게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는 "이런 방식이 현재 이뤄지는 대학생들의 시위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도 "이대 시위 자체가 최순실 사태의 시발점이 됐다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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